학교에 다닐 때에는 공부의 즐거움을 아는 대신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 뿐이었다. 학력고사 세대이다 보니 그나마 고를 수 있는 것은 과학계열 4과목 중 2 과목, 사회계열 3과목 중 1과목, 제2외국어 또는 가사, 가정 중에서 한 과목 고르는 선택과목 정도였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니 처음부터 많은 부분이 고를 수 있는 것이라서, 무거운 선택의 자유가 오히려 부담스러웠을 정도이다. 그리고 졸업 가능한 학점만 이수하면 잘 해도 되고 못 해도 된다고 생각한 덕분에 대충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 취직하고서는 갑자기 하고 싶은 공부를 골라서 하는 데에 재미가 붙어서 지금도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고 있다. 문제는 회사 일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는 것.

대학 친구들 중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 간 이들이 많다. 우리나라에 도입된지 얼마 되지 않은 학문이어서일지도 모르고, 국내에서는 전공을 살려서 갈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낼모레면 마흔인 지금까지도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면, 공부가 그렇게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궁금증을 장회익 교수님의 <공부도둑>(2008, 생각의 나무)에서 풀어볼 수 있었다.

올해 칠순을 맞은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30여년 재직의 명예교수님은 이 책에서 자신의 공부 인생과 사상을 풀어놓고 있다. 판소리 열두 마당처럼 열두 마당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온생명을 강조하는 저자의 신념처럼 인동 장씨인 저자의 5대조 할아버지부터 적어놓은 가첩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6대조 할아버지가 편찮으실 때 당시 13살이던 5대조 할아버지는 약을 구하러 떠난다. 그러다 산길에서 호랑이를 만났는데, 그 호랑이가 아이를 해치는 대신 이끌더니 약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더라는 것. 그 약을 드시고 6대조 할아버지는 병이 나았다고 한다. 아주 오래된 과거도 아닌 1847년경.

저자는 이 5대조 할아버지와 대화하는 방식을 취하며 자신이 공부도둑이 되기까지의 선조들과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본다. 초등학교 중퇴에서 공민학교 진학, 중학교 편입, 공고로 진학, 서울대학고 문리학과 입학, 결혼과 미국 유학까지, 그의 학창기는 한 곳도 쉬운 곳이 없을 뿐더러 매번 수위를 달리는 것이 흥미롭다. 저자는 그 이유로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1년간 야생생활을 하며 스스로 이해하고 자신의 언어로 만든 학습법을 꼽는다.

나는 이과 출신이지만 과학 선택과목으로 택하지 않았을 정도로 물리학을 어려워하기 때문에, 저자의 학문적 성취와 아홉째 마당부터의 물리 이론들에 대해서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후반부의 '온생명'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겠다. 한 개인의 세포와 조직들이 저마다의 활동을 하며 모여 개체를 이루듯 지구의 낱생명들이 모여 만드는 온생명의 개념은, 지금처럼 현실의 이익에 급급해서 환경과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건강한 온생명의 지속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공부도둑이자 공부꾼인 저자의 생애는 참으로 치열하고 그만큼 많은 것을 이룬 듯하다. 지금껏 머리가 터질 정도로 공부 욕심이 없었던 내 모습을 반성하며, 앞으로도 이처럼 건강한 노력과 자세와 실천으로 생각의 틀을 넓히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