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서 고미숙 씨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재미있게 읽은 터라 이 책도 기대를 갖고 읽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는 연암 글쓰기의 본질이나 과정 등을 밝혀 놓았고, 뒷부분에는 연암의 작품 중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넌 기록>,<황금대기>, <범의 꾸짓음>을 함께읽어보며 글 속에 담긴 사상이나 글쓰기 기법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옛 성인들의 글들을 인용해야 좋은 글이란 평가를 얻던 시대에 남의 것을 베끼지 않고 당당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그만이라는 글쓰기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니 보수적이던 그 당시로 보면 매우 용감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겠다. 오죽하면 <열하일기>가 정조의 문체반정에 걸려들었을까. 그래도 용감한 연암이 있었으니 후대의 우리가 이렇게 본으로 삼을만한 좋은 작품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호방한 인품, 글쓰기에 대한 남다른 노하우, 주체사상, 중국의 대하는 마음 등 다양한 인간 박지원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 책 속에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연암에게는 중세의 근대, 탈근대의 모습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연암은 ‘그때’의 구조 속에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그 구조를 성찰하고 구조 너머를 바라본다. 그는 모 든 인간이 ‘그때 저기’를 향해 갈 때 ‘지금 이곳’을 이야기하자고 한다. 지금 이곳이 과연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묻고 불합리한 세계와 치열하게 대결한다. (16.시작하며)

 

연암에 따르면 참된 것은 내 눈앞 사물에 있다. 이를 즉사(卽事)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모범으로 떠받드는 한나라와 당나라는 지금 여기의 공간이 아니며, 위대한 문장가인 반고와사마천은 과거의 사람이다. 연암은 과거가 아무리 훌륭해도 먼 옛날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며, 반고와 사마천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결코 이들을 배우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참된 것은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림으로 그려 놓은 계수나무도 살아 있는 오동나무만 못하다. 아무리 훌륭한 그림일지라도 지금 살아 있는 사물보다 더 뛰어나게 재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30. 글쓰기의 본질/연암의 글쓰기는 생태글쓰기다)

 

연암은 코끼리의 습성과 생태를 유심히 관찰하고 필연의 법칙과 조물주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자연 사물의 질서는 일직선으로 줄 세울 수 없다. 사물마다 우연한 상황들이 있고, 사물 고유의 특성이 있다. 저 크고 넓은 세계의 온갖 현상을 하나의 이치로써 하나하나 규정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정해진 이치란 없으며 자연 사물에는 단순하게 밝힐 수 없는 복잡한 양상들이 있다. 연암은 하늘은 인격자이며 사물마다 객관적인 이치가 있다는 당시의 보편적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48. 글쓰기의 본질/연암의 글쓰기는 생태글쓰기다)

 

이와 같이 <말 머리에서 무지개를 본 기록>은 ‘무엇을’알려주려 하지 않고 ‘어떻게’ 보여줄까에 초점을 둔다. 개인의 여정이나 경험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움직임 자체에 주목하고 그 변화 양상을 보여준다. 작가의 의론을 차단시키고, 자연 경물만을 전면에 내세우는 글쓰기는 기존의 기문, 나아가 기조의 산문에서조차 보기 드문 표현 방식이다. (63. 글쓰기의 본질/연암의 글쓰기는 생태글쓰기다)

 

글은 자연은 소리와 빛깔, 정과 경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 연암이 말하는 정은 눈앞에 마주친 경물을 통해 시인의 마음을 대신 전달하는 것이다. 연암에 따르면 이별이 슬픔을 표현할 때, “말없이 애간장을 녹이면서 헤어진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별이라는 글자에 주석을 단 멋대가리 없는 표현이다. 이별하는 데 가장 적당한 공간인 물가의 경치를 보여주면 그 간절한 마음이 더 효과적으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66. 글쓰기의 본질/연암의 글쓰기는 생태글쓰기다)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 묘지명>

강가에 말을 멈추어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휘날리고 돛 그림자가 너울거리다가, 기슭을 돌아가고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은 검푸르러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다.

 

곧 생태글쓰기란 자연 사물의 생태로부터 깨달음을 얻어 나와 타자, 인간과 자연 간의 다양성을 자각하고 상생과 공존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글쓰기다. 생태 글쓰기에서 자연 사물은 단순히 소재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자연 사물의 생의로부터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주거나 인간의 심미 의식을 높여 준다. (69. 글쓰기의 본질/생태 글쓰기는 상생과 공존을 이야기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내 진심을 표현하면 그뿐이다. 진심을 표현한다는 것은 내 품은 생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글의 본질은 닮는 데 있지 않고 멋있는 표현에 있지도 않다. 작가의 속생각이 저절로 드러나는 글, 평소의 자연스런 모습을 표현하는 글이 좋은 글이다. 폼 잡는 말, 고상한 문체를 쓴다고 좋은 글이 아니다. 비속어나 일상의 말도 내 진심을 드러내는 데 소용된다면 써야 한다. (91. 글쓰기의 기본 방침/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해서 우유부단하기만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92.글쓰기의 기본 방침/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어린 아이가 나비를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다리는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돋움하며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서 다가갑니다.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나비는 날아가고 맙니다.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기에 겸연쩍어 씩 웃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할 때의 마음입니다.(93. 글쓰기의 기본 방침/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그러므로 ‘지금’은 ‘옛날’과 대비해 부르는 이름이고, ‘비슷하다’는 것은 ‘저것’과 비료해 쓰는말이다. 무릇 ‘비슷하다’는 것은 비슷하기만 할 뿐이고, 저것은 저것일 뿐이다. 비교한다고 해서 이럿이 저것은 아니니, 나는 이것이 저것과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종이가 희다고 해서 먹이 따라허 하얘질 수는 없으며, 초상화가 아무리 진짜 같다고 해서 그림이 말을 할 수는 없다. (99. 글쓰기의 기본 방침/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대상을 묘사할 때는 평범하게 좋은 것을 좋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흠이나 결점, 즉 남들과는 다른 그 사람만의 개성이나 삶의 방식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둥근 것은 모나게 그리고 긴 것은 짧게 그릴 때 더 진실한 대상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보았다. (110. 글쓰기의 기본 방침/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이는 곧 연암의 글은 정보나 지식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고, 논쟁을 촉발하거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독자의 반성을 유도하거나 독자에게 흥미를 주려는 데 목적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처음에 과감하고 분명한 논지를 제기하라는 것이 연암이 말하는 서두의 글쓰기 요령이다. (114. 글쓰기의 기본 방침/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그의 글쓰기 과정은 ‘탐구심으로 관찰하기-자연 사물과 교감하기-자료 모으기-제목에 따라 구상하기-(내용 조직하기)-협력적인 글쓰기-수정하기’로 정리할 수 있었다. (123. 글쓰기의 과정)

 

“처음 초고를 잡을 때는 마음에 치우친 뜻이 있어 스스로 글의 결점과 문제점을 보기 어렵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처음 글을 쓸 때 가졌던 치우친 마음이 없어지고 객관적인 마음이 생겨 비로소 그 문장의 잘잘못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138. 글쓰기의 과정)

무릇 글에는 옛사람의 뜻을 취해 쓴 것도 있고, 자기가 뜻을 만들어 쓴 것도 있습니다. 옛사람의 뜻을 취해 쓴 것을 그 말을 어렵게 해 다른 사람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처럼 해야 하고, 자기가 듯을 만들어 쓴 것은 그 말을 쉽게 해 남들이 의심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옛사람의 뜻을 취하면서 아울러 그 말까지 취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책의 이름을 써서 구별해 내 말과 섞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이 진부해지거나 표절한 글이 됩니다. -이건창 <답우인논작문서>

 

(글을 마쳤으면) 잠시 내버려 글상자에 넣어 두고, 눈으로 보지 말고 또 가슴에서 깨끗이 씻어 몰아내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룻밤 또는 2,3일을 잔 뒤에 일어나 다시 그것을 취해봅니다. 내가 내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느슨하게 만든 뒤에 남의 글을 보듯이 하면, 옳은 것은 즉시 그 옳음이 드러나고 그른 것은 즉시 그 그른 점이 드러납니다. 그른 것은 버리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건창 <답우인논작문서> (146. 글쓰기의 과정/연암의 글쓰기는 과정 중심이다)

 

연암 그룹은 글이 담아내야 할 주요대상을 자연 사물로 확장함으로써 글쓰기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다. 이들에겐 자연은 살아 있는 몸짓, 일상의 모든 존재가 표현 대상이다. 재잘대는 새소리, 튀는 벌레가 한 편의 시이고 글이다. 오히려 과거의 글에서 법 삼으려 한다면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한다.(155. 맥락의 글쓰기, 전략의 글쓰기/연암의 글쓰기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