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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ZE :: 恩田陸

감당할 수 없을만큼 괴롭고 힘든 일이 생기면 누구나 한번쯤 자살을 떠올리게 된다. 쉽게 실행에 못옮기는 이유는 대체로 두가지로, 하나는 생에서 죽음의 길로 건너가기 위해 격렬한 고통을 통과해 가야한다는 두려움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여태까지 살아왔었던 것에 대한 미련 또는 앞으로에 대한 일말의 희망 때문이다. 결국 괴로울 때의 강렬한 자살 충동은 진정으로 죽음을 바래서라기보다 당장의 순간 스스로의 존재가 정지되거나 무無로 돌아가고 싶다는 심리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어거지로 숨을 내쉬며 일초 일초 앞으로 끌려가다시피 하는 순간에 지치고 막막해서 제자리에 주저앉아 시간에 저항하며 그나마의 자주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필사의 마음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살 충동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자살을 욕망할 때는 얼핏 스스로를 혐오하며 직접 숨통을 끊고자 하는 행위로 보이지만 기실 바라는 것은 자기 존재를 멈추게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고통을 멈추게 하고 싶을 따름인 것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오류와 그에 따른 의문이 생긴다. 죽으면 고통이 멈추는가? 어째서 죽어버리면 '해방' 이 된다고 믿게 되는 것일까? 사후 세계를 증명할 방법은 거의 없다. 자살 너머에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껏 맘먹고 죽고 났는데 고통의 감각은 여전하다면?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 믿는 것은 '이쪽 세계' 에 살고 있는 자의 잘못 세뇌된 착각이 아닐까? '더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건 '이쪽 세계' 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자들의 판단이다. 이미 죽은 자가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는 '이쪽 세계' 에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저 '평온해졌길' 마음으로 기릴 뿐이다. 그런 망자에 대한 소망을 스스로에게 적용시켜 자신도 죽으면 '편안해질거라' 은연 중에 믿게 되버린건 아닐까? 이렇게 우리는 '이쪽 세계' 에서 알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일을 짐작하고 믿어 버리는 우를 얼마나 많이 범하고 있는가. [두려움] 이라는 것 역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 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인적이 없고 접근이 힘든 황야에 정체불명의 건물이 하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그곳에 들어간 부지기수가 그 안에서 사라져버렸다. 내부는 감각을 잃기 쉬운 미로로 되어 있으며 한번에 한사람씩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협소하다. 이곳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이런저런 가설이 세워진다. 골격이 튼실한 남성만을 잡아먹는 살아있는 건물로 한사람씩 삼킬 때마다 건물의 부피가 늘어나고 회색의 벽은 인골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야기나 건물을 둘러싼 괴식물의 뿌리 밑에는 시체가 쌓여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등이 거듭되며 건물은 점점 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사라진 사람들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면서도 '내부에 들어가면 끝' 이다 라는 개념이 건물에 대한 공포를 가속시킨다. 이것은 마치 죽음에 대한 개념과도 같다. '사라지는 것' '없어지는 것' '끝나는 것' 이라는 건 결국 '이쪽 세계' 에서의 결과만이 아닌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하는 가설은 그저 추측에 불과하지 않은가. 건물 안쪽, 벽 너머는 그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일뿐, '두려움' 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건물의 정체가 현실적인 것으로 밝혀졌을 때 등뒤를 바싹 압박하던 공포는 눈깜짝할 새에 사라진다. '모르는 것' 에서 '알고 있는 것' 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니, '알고 있다고 믿는 것' 이라 해야 더 옳은 표현일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즉 보이는 것들이 전부 진실이라고 할 수 없어서이다. 메구미가 숨겼던 프로젝트는 미쓰루가 보기에도 독자인 우리가 납득하기에도 '드러난 진실' 처럼 여겨지지만 드러나는 것은 '숨겼다' 는 사실 뿐 무엇을 숨겼는지까지는 끝내 밝히지 않는다. 세상 어딘가에 음모가 있는 것은 알아도 무슨 음모인지는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쓰루도 독자도 그저 '알게 되었다' 에 만족하고 안도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을 '죽음' 에 적용해도 되지 않을까? 죽음을 알 수는 없지만, 이를테면 그것은 '저쪽 세계' 의 음모와도 같지만 죽음이라는 세계가 있다는 '진실' 을 초연하게 받아들임으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작가는 메구미와 미쓰루에게 '건물 안의 환상' 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는지.

체감상 오랜만에 나온 온다 리쿠의 신작으로, 이른바 간바라 메구미 시리즈 중의 첫권이다. (※ 한자로는 神原惠彌, 요미가나로는 かんばらめぐみ 인데 발음상 '칸' 보다 '간' 이 더 부드러워 '간바라' 라고 번역한 듯 싶다) 발매된다는 소식은 진작부터 있었으나 좀처럼 나오지 않아 조급한 마음에 원서를 먼저 읽었지만, 몇개월 차이를 두고 번역서를 다시 읽으니 새삼 재미가 새록새록하다. 처음 읽을 땐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의 기묘한 환상소설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지만 다시 읽으니 [네버랜드] 의 성인 버전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고립된 공간에서 네 명의 인원이 불가사의한 미스터리를 풀어나간다는 면이 꼭 닮아있어서 그렇다. [삼월] 시리즈의 환상 공간에 [네버랜드] 의 좀더 리얼한 배경을 결합한 것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세계관이 뚜렷한 온다 월드 안에 속해 있다는 점에선 변함이 없다.

연작으로 읽다보면 온다의 소설은 크게 두 패턴으로 나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환상 공간을 배경으로 했는가와 보다 현실적인 배경을 채택 했는가 이다. 재미있게도 전자의 경우는 환상 공간을 깨고 현실적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현실의 경계를 흐트리고 환상적 결말을 이끌어낸다. 그러한 경계 파괴가 온다식 작품관의 가장 큰 핵심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도 환상 소설적 배경에서 시작했다가 결말 부분에서 다소 맥이 빠진다 싶을 정도로 현실적 결말을 맺지만 가까이서 작품 구성만을 볼게 아니라 몇발자욱 떨어져 작가관을 관망하고자 하면 나름 근사한 결말이라고 납득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작품 내에서 수시로 공간 관념을 언급함으로 스스로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듯한 면모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사견임이 분명한 미래관은(p185) [도코노 시리즈] 나 [라이온 하트], [로미오와 로미오는 영원히] [나사의 회전] 등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는 공통된 테마이니, 결국 온다의 모든 작품이 장르와 배경을 달리한들 같은 테두리 안에 같은 주제를 얘기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작년에 거세게 불었던 온다 리쿠 돌풍이 한풀 꺾이면서 비판적인 독자들도 늘어나고 역서 출판도 주춤거리는 국내 근황이지만, 작년도 일본 독자 대상 인기 투표에서 미야베 미유키에 이어 여자작가 부문 2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여전히 과시하고 있고 그를 증명하듯 올겨울에만 무려 4권의 신간을 연달아 냈다. 연재가 마무리 되어가는 장편들과 미수록된 단편들도 있으니 이 추세라면 올해 안에 대여섯권의 신간이 더 나올 여지도 있다. 일본의 다작 시스템은 확실히 평작과 졸작 양산의 리스크가 적잖기는 하지만 팬의 입장으로선 작가와 자주 소통하는 기분에 그저 기쁘고 반갑기만 하다. 배워둔 언어의 힘을 빌려 현지 발간 속도에 맞춰 바로 바로 읽는 것도 좋지만, 가급적이면 역서로 국내에 더 많이 소개되었음 하는 바람이다. 작가와만이 아니라 작가를 좋아하는 다른 독자들과 더 가깝게 소통하고 싶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