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에 올라본 일이 있는가?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에 올라본 일이 있는가?

자연상태에서 포효하는 호랑이를 본 일이 있는가? 흰머리를 보고 넋이 나가버리지나 않을까

흰눈이 첩첩이 쌓여 푹푹 허벅지까지 빠지고 울울창창 밀림속
온갖 포식자들의 울부짖음이 귀를 울리는 것처럼 생생한 묘사, 가끔 그의 글재주에 말려들어 본령을 잊어버리고 개마고원과 백두산의 험산준령을 내가 헤매고 있는 것 같은 환상이 나를 사로잡는다.

 아버지를 죽이고 동생의 한팔을 앗아간 백두산의 왕대 흰머리를 당신이 개마고원 내림 포수 산이라면 그냥 두겠는가?

암호랑이를 죽이고 새끼 호랑이마저 죽인 집의 자손들을 그냥 두겠는가.  백두산 왕대 흰머리라면?

이런 생각을 해본다. 표준말, 요즘말이 아니라 그 당시의 개마고원 사투리가 담긴 소설이었다면 더 깊숙히 그 시대로 빨려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차이가 일제시대였지만 한켠으론 요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했다.

생명을 끊는 일은 쉽게 정해선 안 된다. 사냥 전에는 반드시 혼자 총을 정비하여 스스로에 묻고 또 물어라. 짐승을 쏠 땐 한 번 묻고 호랑이를 쏠 땐 열 번 묻고 사람을 쏠 땐 백 번 물어야 한다. 이 길밖에 없는지.’ 274쪽

’말로 설명하고 말로 이해하고 말로 받아들이고 말로 포기하기에는 불행의 무게가 너무 컸다. 불행을 안긴 존재를 내버려두고 새로운 인생을 준비할 순 없었다. 비겁이라고 느꼈다. 산이 복수의 세월을 보낸 것은 쌍해의 고백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고백이 산의 마음을 흔들었다. 산은 자신에게 밀려드는 새로운 가능성들이 때론 싫고 때론 짜증나고 때론 불편하고 때론 치욕스러웠다. 흰머리를 구하는 것이 마지막 승부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315~6

내손으로 정정당당하게 대결하여 사로잡지 않은 것은 산의 목표가 아니다. 천지의 눈사태가 흰머리를 잡아준 승부는 무효다.
흰머리의 상처를 치료하여 1:1 대결을 벌여 깨긋한 승부를 가리자. 내가 죽든 흰머리가 죽든.. 참 묘하다. 산만 흰머리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흰머리도 산을 의식한다.

더 빨리 해수격멸대 히데오와 총독부의 의도를 파악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사랑하는 연인 산과 주홍의 애절한 사랑,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염원은 흰머리를 죽이려는 자와 흰머리를 살리려는 사람들과의 손에 땀을 쥐게하는 대결을 벌리게 되고 행주산성에 그들은...

한반도에서 최후의 호랑이가 목격된지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다. 천상 이야기꾼 김탁환은 거친시대, 밀림을 넘나들었던 포수들과 백두산 호랑이를 통해 어깨가 축져진 중년의 사내들에게, 소설을 읽지 않는 친구와도 같은 사내들에게 읽을 거리를 제공하여 힘내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꽃피고 새우는 개마고원의 봄날을 함께 거닐고 싶었던 산과 주홍의 염원을 가슴에 담아 언제고 호시절에 백두산과 개마고원을 누비고 싶다. 거기서 가만히 귀기울이면 흰머리 후손의 포효가 들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