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클로스 말고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어김없이 컴백하는 '그'가 있다. 하지만 역변으로 인해 환상이 깨져버린 이후로는 오면 오나 보다~ 가면 가나 보다~하고 영화 속 밤손님 만큼이나 반갑지도 않은데 계속 찾아온다. '그'가 스킨 로션으로 자신의 쌍뺨따구를 때리기 시작하기 훨씬 이전에는 정변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그'가 빼놓지 않고 찾아왔더랬다. 바로 자린고비와 함께 구두쇠의 양대산맥인 스크루지! 초등학교 때(사실은... 국민학...) 국어 교과서에 희곡으로 실려서 조별로 연극을 발표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작품이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작년... 아니, 벌써 재작년인 2013년 크리스마스엔 EBS에서 짐 캐리 버전 애니메이션을 방송했었는데, 이번엔 건너뛰나했더니 원작 소설로 만나게 됐다. 큰 줄거리는 기억나지만 스크루지의 과거 부분은 그새 기억이 희미해졌다. 원작을 읽어보지 못한 탓에 버전마다 약간의 각색이 있었겠거니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현대판 스크루지가 아닌 이상  대개는 원작에 충실했던 것 같다. 한 가지 기억과 다른 게 있다면, 스크루지 혼자서 대저택에 살고 있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너무 낡아 아무도 살지 않는 독신자 아파트였다. 그러니까 미래로 갔을 때 동네 사람들이 그의 침대 커튼, 담요, 셔츠 따위를 쉽게 훔쳐서 내다 팔 수 있었던 거다. 그리고 추운 날에도 석탄 한 덩어리, 죽 한 그릇으로 떼운 것이 단순히 절약 차원이 아니었다. 돈이 많다고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편안하게 즐기는 것도 아닌, 그저 돈을 우상으로 여겼다는 게 그가 어디 사느냐로 확실해졌다. 그 낡은 집 계단의 묘사에서 약간의 정치 풍자까지 엿볼 수 있는데, 원작 소설이 아니면 놓칠 수 있는 부분이다.

 

p.36-이 층계로 말할 것 같으면 낡았지만 마차도 올라갈 정도로 튼튼하면서도, 마치 국회에서 막 통과된 엉성한 악법처럼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처럼 생겼다.

p.54-하나같이 말리의 유령처럼 쇠사슬을 감고 있었고, 몇몇은 서로 묶여 있었다. (아마 죄지은 공무원들일 것이다) 어느 유령도 자유롭지 못했다.

 

과거의 크리스마스 유령은 부드러우면서 엄한 모습, 현재의 유령은 흥겨우면서도 호탕하고 거친 모습, 미래의 유령은 말없이 손가락질만 하는 무서운 모습이 여전하다. 스크루지의 어린시절은 가족과 떨어져 기숙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며 외톨이로 지냈다. (나중에 못마땅한 조카의 엄마가 될) 여동생이 찾아와 이제 집으로 돌아와도 된다는 소식을 전하는 걸 보면 아버지와 사이가 나빴던 걸로 보인다. 옛 애인이었던 상복을 입은 여자는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오지 않지만 지참금 어쩌고 하는 걸 보면 여자가 가난하다고 찼던 게 아닐까 싶다. 돈의 노예가 돼버린 그를 떠나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박진영의 '니가 사는 그집' 노래 가사처럼 어쩌면 자기 것이었을 행복을 아쉬워한다. 아직 젊은 직원이었을 때는 따뜻한 마음의 사장 밑에서 넉넉하진 않지만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즐겼으면서 왜 그렇게 변했는지... 역변이란 아무리 해도 이유를 알 수 없나보다. 

 

 

<무한도전>에서 실수로 '노홍철'이라는 이름을 내뱉은 정형돈이 급격하게 표정이 어두워지며 '그녀석'이라고 고쳐 불렀던 것처럼, '스크루지'라는 이름이 나온 것만으로도 현재의 조카 집에서 벌어지는 모임의 분위기가 확~ 다운된다. 괴물 알아맞히기 게임을 하는 장면은 사실 좀 잔인해 보인다. 착한 조카인 줄 알았는데 뒷담화에 끼는 게 좀... 보통 그 장면은 대부분의 스크루지들이 경악하며 괴로워하는 포인트인데, 원작에선 삼촌을 위한 건배에 이내 기분이 좋아지는 걸로 넘어간다. 요즘 같았으면 갑의 횡포라며 SNS와 종편채널에서 괴물 알아맞히기 게임이 진행되고 스크루지는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일이다. 올해도 연초부터 사실 확인도 안 된 백화점 주차장 무릎꿇리기 사건으로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원작의 스크루지처럼 다들 좀 쿨하게 넘어가면 안 되는지, 원. 우리는 크리스마스 유령 없는 그런 현재에 살고 있다.

 

 

현재의 크리스마스 유령이 보여준 비참한 몰골의 아이들-'무지'와 '궁핍'은 시험 출제에 안성맞춤인 직설적인 비유다. 요즘이라면 불통과 각박함이 어울린다. 전쟁이나 재난이 일어나면 가끔 주변에 인구가 줄어서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스크루지도 그런 말을 했다가 유령에게 된통 혼난다. 사람을 생명으로 안 보는 것도 일종의 인색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매년 크리스마스에 케빈은 못 주지만, 스크루지가 전해주는 것이 바로 그런 경각심이다. 종교와 상관없이, 선물과 상관없이 달력의 빨간날이자 TV에서 '재미있는 거' 많이 해주는 것만으로 즐거웠던 크리스마스가 언제부턴가 감흥이 없어졌다.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는 데 인색해져서가 아닐까. 보이지 않는 쇠사슬을 칭칭 감은듯 마음이 무거워진다. 돈이 아니라 무정함 때문에 가난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행복해지는 방법은 별거 없다. 나중에 복권 당첨되면 기부해야지~하는 생각 따윈 버리고, 다음 한 줄로 마음의 부자라도 되어보자!

p.133-서로에게 만족했고, 함께 하는 시간을 즐거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