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로설 속 남주들은 비현실적이리만큼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잘 생기고, 관능적이고, 능력 있고, 집안 배경도 빵빵하고. 하다못해 처음엔 가난했던 남주도 끝내는 돈을 벌고 성공을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남주가 사랑하게 되는 건 돈이나 뒷배경에 신경쓰지 않는 순수한 여주인데, 사실 이런 글을 읽으면서 좀 비뚤어진 생각을 하곤 합니다. 만약 그 남자가 돈을 잃고, 능력도 사라진다면 그 여자는 여전히 남자를 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아마 힘들겁니다. 빵빵한 재력에 익숙해져있던 남자가 사라져버린 돈에 쉽게 적응할 수 있을 리 없고, 아무리 여자도 무한정의 인내심을 보여주지만은 않을테니까요.

그런 가운데, 에우리디케님이 새로운 글 한편을 들고 오셨으니, 조건 안 좋은 남자도 멋진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자격 충분하다는 것을 당당히 보여주는 글 이었습니다.

글 속의 남주 이자크는 잘 생긴 피아니스트긴 하지만, 돈이나 뒷 배경은 없는 사람입니다. 거기에다 인정 받은 피아노 실력으로 돈을 벌려하기 보다는 이곳 저곳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주위에서 함께 일하며 그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어하는, 지극히 이상적인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로설이 아닌 현실로 나온다해도 이자크의 조건은 그다지 좋은 게 아닙니다. 이 정도라면 딸 가진 부모라면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사윗감이겠죠. 여주인 새아 역시도 결코 부잣집 딸이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라, 나름대로 꿈을 갖고 있는 평범한 20살의 아가씨죠. 결국 새아와 이자크 두 사람 사랑에서 물질적인 조건 자체는 이미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자크와 새아의 사랑은 다른 로설속의 어떤 연인들과 비교해도 결코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질적인 부분이 빠져 있기에 더 순수하고, 더 낭만적이고, 더 뜨겁고,  더 달콤합니다. 비싼 보석도 없고, 레스토랑 전체를 빌린 생일 파티도 없고, 값비싼 명품 선물도 없지만, 읽는 독자들을 한숨 쉬게 하는 로맨스가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펼쳐집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몸을 끝없이 사랑스러운 무언가로 봐주는 사람, 그런 사람과 함께 그의 소박한 방에서 나눈 관계와, 많은 여자/남자들의 관심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며 그(녀)의 사랑스러움보다는 자신의 성적 매력을 더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과 호텔 스위트 룸에서 하는 관계, 둘 중 어떤 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 지는 이미 말이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머리론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물질적인 것에 너무 흔들리는 게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죠. 물질적인 것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굶어죽을 수는 없을테니까요.  그야말로 내 현실에 만족하며 거기에 맞춰 살아간다면 금전적인 문제로 허덕이는 사람이나 빚더미에 깔려 신용불량자가 되는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밖에는 되지 않을겁니다.

혹시라도 제가 가난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 역시도 가난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부모님이 열심히 일하신 덕에 넉넉한 형편이 되었지만 제가 13살이 될 때까지 저희 집은 빚더미에 허덕였고, 제가 아주 어렸을 때는 하다못해 부모님이 아이스크림 하나 풍선 하나도 쉽게 사주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저희 가족은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최소한 밥은 굶지 않았고, 자장면 한 그릇이라도 아주 가끔씩은 외식을 하며 기분을 낼 수 있었고, 식사비와 차표값을 딱 맞춰야 할지언정 네 가족이 시간을 내서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으니까요. 부잣집, 재벌들이 하듯 화려하게 사는 건 아니었지만 우리 가족 형편이 되는 한도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찾아 누렸으니까요.

이미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반드시 돈이 많아야만 즐겁게 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돈이라는 게 사용되기 훨씬 더 전부터, 빈부가 나눠지기 훨씬 전부터 사랑은 존재해 왔습니다. 돈, 보석, 명품 이런 것들이 나오기 시작한 건 한참 후죠. 그 반대가 아닙니다.

장미 한송이, 아니 하다못해 길가에 핀 꽃 한 송이를 꺾어준다해도, 날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거라면 그 자체가 이미 특별한 이벤트입니다. 값비싼 레스토랑에서의 식사와 멋진 차로 하는 드라이브, 언제부터 이렇게 물질적인 것이 순수한 사랑, 멋진 로맨스의 증거로 착각되기 시작한 걸까요?

다시 순수한 사랑의 원점으로 돌아간 새아와 이자크의 로맨스, 이제 완결이 났다는 것이 아쉽지만 곧 더 멋진 작품으로 작가님을 다시 뵐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