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모니아라는 가상의 대륙을 배경으로 한 발터 뫼어스의 다른 환타지 소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어서 연작 시리즈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다가 순간 당황했다.

51살까지 살면서 무려 9850점의 작품을 남긴 프랑스의 판화가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를 매개로 만든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이름도 귀스타브 도레이다. 마치 귀스타브 도레가 12살에 겪은 모험을 토대로 평생 판화를 만들었다는 착각을 줄 만큼 발터 뫼어스의 소설과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가 절묘하게 어울어진다. 판초를 타고 가는 돈키호테의 판화는 절묘하게 모험을 떠나는 귀스타브 도레의 모습으로 대치되고. 책을 다 읽은 다음에 다시 판화의 원제목을 확인하면서 책에 나온 판화를 확인하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었다.

죽음과 맞닥뜨리지만, 죽기를 거부하고, 죽음의 사신과 거래를 하는 귀스타브, 죽음의 사신이 내건 과제를 다 수행하면 다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단다. 마치 장자의 나비의 꿈을 보는 듯이, 귀스타브가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니면 우주를 떠도는 귀스타브의 모험이 진실인지 아리송한 느낌을 준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인간의 삶에서 극복하거나 받아들여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도 하는 소설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괴물은 시간이고, 그 다음은 운명, 세번째는 근심이란다. 그런데 근심은 어느날,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자신도 근심을 하게 되는가 하면, 시간은 스스로도 늙는다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게 된단다. 유한과 무한의 경계가 무엇인지도 문득 생각하게 하는 측면.

그래도 군데군데 발터 뫼어스 특유의 해학도 살아 있다.  한때 대단한 야망을 품고 전염병, 십자군 전쟁, 수많은 크고 작은 폭동, 대량학상 혁명 등등을 일으키면서 의기충천해 있던 죽음의 사자..... 그런데 인간들을 죽이고 또 죽여도 지구의 인구는 불어나기만 했단다. 죽음의 사자의 맹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결국 죽음의 사자는 의욕을 잃고 연금생활자가 되었단다.....ㅋㅋㅋ

다른 발터 뫼어스의 소설처럼 쉽게 읽히면서 생각지도 못한 광대한 상상의 영역을 즐기는 즐거움은 덜하지만, 정교한 판화를 꼼꼼히 보면서 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