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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성모님이나 천사를 묘사한 그림에 대해서라면, 당장에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내리고 결점을 집어낼 수도 있으리라. ... 그러나 그 이상 더 잘 묘사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묘사된 이교 신의 그림을 마주하였을 때, 사람들은 대체 무어라 평가할 수 있을까. 확실히 그것은 괴이하기 짝이 없는 것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완벽하게 부정해버리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히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저항하기 어려운 매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p.95)

그렇다.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특별한 스토리 없이 끝나버린 책의 허무함에. 잡힐 듯 어렴풋이 떠다니는 책의 잔흔에.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일식>(문학동네.2009)은 괴이했으나, 알 수 없는 매력이 담겨있는 책이었다.

겉은 종교로 치장되어있다. 열렬한 신심, 이단징벌. 그러나 이야기의 본질은 단순히 신앙에 머물지 않는다. 주인공은 젊은 수도사.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한 여행길에서 그는 연금술사를 만난다. 마술적인 이단과 신심을 담은 학문의 경계인 연금술 안에서 수도사는 괴로워한다. 머리로는 연금술이 이단의 짓이라는 사실을, 금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낼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그러나 그는 끌린다. 연금술사의 호젓한 모습에, 목적이 아닌 연금술의 과정에. 어느 날 연금술사를 뒤쫓아간 동굴 속에서 그는 안드로규노스(남녀추니: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모두 가진 사람)를 본다. 기이한 빛을 내는 그 이상한 존재를. 결국 안드로규노스는 마을에 재앙을 가져왔단 마을 주민들의 어리석은 믿음에 마녀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 수도사는 안드로규노스와의 합체를, 신에 가까이감을 느낀다.

이단을 처형하는 화형식을 게이치로는 장대하고도 화려하게 묘사한다. 동요가 없는 안드로규노스, 불에 타올라 몸이 요동치기 시작하자 해를 가리는 일식, 거대한 남체와 여체의 결합, 해를 향해 쏘아지는 양물의 마지막 기운까지. 왜 이런 기괴한 장면이 필요했던걸까.

수도사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자신이 몸담은 정통 기독교에 대한 신심과 이단의 철학 사이에서. 그는 신실한 신자였으나 '영'만을 고집하는 정통 교리에 의심을 품는다. 그런 그에게 연금술과의 만남은 새로운 깨우침을 전한다. '본질이 녹아 서로 어우려져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본질은, 이전의 본질을 전혀 잃는 법 없이 모순된 채로 그 두 가지를 그대로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p.93) 이 말이 그가 원하던 답은 아니었을까. 서로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닌, 각자의 본질을 지니며 조합되는 상태. 그건 연금술의 논리이자 세상의 이상이었다.

다시 화형식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정통 기독교에서 진저리치는, 몸의 결합을 통한 신성의 표출은 '영'과 '육'이 함께할 때 비로소 신에 가까이 감을 보여주는 극적인 묘사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일식현상 또한 마찬가지.) 이는 수천 문장으로도 풀어낼 수 없는 진리에 대한 명쾌한 답변이다. 양과 음, 태극, 남과 여, 선과 악...... 떨어져있으나 본질적으로 같은 무수히 많은 존재들에 대한. 모든 걸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우리의 사고는 얼마나 편협한지. 시간이 흐른 후 보여지는 주인공 수도사와 이단재판관이었던 자크 모습의 비교가 이를 드러내는 건 아닐까 싶었다.

히라노 게이치로. 그는 이 난해한 소설 속에서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난 그가 박아둔 곳곳의 문장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했다. 비록 소설의 배경은 15세기 유럽이지만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목적을 넘어서는 과정의 가치. 수용하기 어렵단 이유로 가치배제시키는 몸의 논리. 연금술의 논리를 통해 보여준 관계의 건강성. 그 외의 자잘한 지혜를 찾는 건 이 책의 또 다른 보물찾기이다.

아니, 구태여 의미를 찾는 일 자체가 의미없을지도. 그가 보여주는 세상은 어차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단지 순간의 동요와 놀라움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독서는 성공적일지지도 모르겠다. 가는 길은 고되나, 그 끝은 아름다우리라. 이 말이 이렇게 잘 들어맞는 책이 <일식>이 아닐까. 이제 시작할 사람들에겐 응원의 메시지를, 이미 읽어낸 사람들에겐 수고의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