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싸웠다. 수영장 목욕탕에서. 엄마가 몇 번을 들려줬지만 건성으로 ‘그러면 안 되는 데’라며 흘려보냈던 일 때문에 결국 사단이 난 것이다. 이야기의 전말은 이랬다. 군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을 다니시는 엄마는 항상 수영장 목욕탕에서 씻고 오신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엄마의 연령대를 생각하면 할머니시다)가 뜨거운 물이 잘 나오는 꼭지를 혼자 독점하신다고 했다. 누군가 그 꼭지 앞에서 씻기라도 할 치라면 ‘그 자리는 내 자리니 냉큼 비키라’고 화를 내신단다. 언젠가 우리 엄마도 그 분께 당하신 듯 분을 참지 못하고 ‘다 같이 이용하는 건데 자기 자리가 어디 있냐’며 그 아주머니를 욕했다. 내 앞에서.

 

며칠 전 수영장 목욕탕에서 먼저 자리를 차지한 엄마가 문제의 수도꼭지 앞에서 씻고 있을 때 늦게 등장한 문제의 그 아주머니와 엄마는 크게 싸웠단다. 언젠가 큰 소리로 싸우면 싸움에서 지는 거란 나의 충고(?)를 충실하게 따른 엄마가 싸움에서 이긴 것 같았다. 함께 씻던 주위의 아주머니들 대부분 엄마를 지지했다는 걸 보면. 공공시설에 사적 소유를 주장하신 그 아주머니는 자신이 빈번하게 이용했다는 물리적 행동이 무의적으로 내 것이라는 심리적 소유권을 스스로 창조하신 듯 했다. 여하튼 엄마는 앞으로 그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지는 그 수도꼭지 자리가 비었으면 당당히 그 자리를 이용할 것이다. 공짜로 얻어지는 열매는 없는 법이다. 말싸움이라는 약간의 폭력 사태를 겪긴 했지만 지켜보고 참기만 했다면 바뀌는 건 없었을 것이다.

 

유신시대 학생이었던 황현산 선생님은 원어로 된 원서를 손에 얻기 위한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 했단다. 워낙 검열이 심했던 시대라 외국에 원서를 신청하고 그 책이 국제 우편으로 서대문 우체국에 도착하면 검열을 담당했던 여직원이 쉽사리 책을 건네주지 않았다고 한다. 공부와 지식에 목말라 있던 청년 학생에게 눈에 뻔히 보이는 책을 손에 넣지 못한다는 건 고통 그 자체였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시대가 그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행할 수 있던 시대였다는 것. 유신이 비상식이었다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또한 비상식적이어야 살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 부정의와 부조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면 내면에서 비상식이 상식을 갉아 먹는다. 옳지 않음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내면에 웅크린 진실과 성찰의 인간다움을 지워버린다.

 

황현산 선생님의 글은 부드럽다. 그러면서 은근히 치명타를 날린다. 글자를 따라 흐뭇하게 읽어 가다 보면 어느새 스스로 반성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 길지 않은 글에서 긴 여운을 느낄 수 있다. 그저 합당한 언어와 정직함으로 사유를 표현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소박함이 녹아있는 선생님의 글은 그냥 참 좋다. 살아가는 세상의 일들 중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무심하게 흘려버려 놓쳐버렸던 것들을 다른 시선과 방향으로 되새김 할 수 있어 좋다.

 

당연한 것을 뒤집어 생각해보자. 시대가 그걸 원한다. 당연한 것은 없다. 비상식이 상식을 누르고 부정의가 정의를 대신하는 거꾸로 된 시대. 자동차는 두 바퀴로 가고, 자전거가 네 바퀴고 달린다. 물속으로 비행기가 날고, 하늘에 돛단배가 난다. 복잡하고 아리송하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린 포수에게 잡혀온 잉어마냥 한 숨만 쉬게 될 것이다. 시작은 상식적인 사유에서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와 세상에 정직해야한다. 끊임없이 반성해야한다. 혼자서 어렵다면 선생을 만나면 된다. 밤을 벗 삼아 이 책을 한 번 읽으시라. 짧지만 오래가는 향기로 사람이라면 사람다운 삶을 고민하게 만들어줄테니 말이다. 그렇게 서서히 변하게 된다. 가만있으면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최소한 책이라도 읽고 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