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을 향해 달려간다. 혼자가 아닌 탓에 문은 더 좁아 보인다. 노비도, 양반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결국 관직이며 권력이고 부일 것이다. 좀 더 나은 삶이 그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좁은 문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저만치 먼 곳에서 인간의 삶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노비도 양반도 주어진 삶에 매몰돼 더 큰 그림으로써의 인생을 고민하진 못했다. 좁은 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을 비웃지만 이미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에 대해 부러움을 감추진 못한다.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큰 판을 짠 누군가(라캉이 말하는 대타자가 아닐까 잠깐 생각했다)를 망각한 것이다. 옆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장치는 언제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만들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개인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고민한 사고의 결실이라 생각하니까.

 

이 책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노비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비가 양반으로 달려가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이 책은 양반을 결과적으로 말하고 있다.

 

양반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였던 노비는 차례차례 양반을 모방한다. 먼저 양반이기 위해서 그들은 성이나 본관을 가진다. 또 자신의 신분을 평민으로 바꾼다. 평민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증거는 남는다. 도망치던 노비의 삶에서 벗어났지만 군역이라는 새로운 삶의 무게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꾸역꾸역, 차곡차곡 자신의 돈을 모아 양반의 직을 사들인다.

 

가부장제를 만들어 간다. 처가살이가 아니라 시집살이를 통해서, 딸과 아들에게 균등하게 재산을 남겨주는 것이 아니라 장자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차별이다. 여전히 차별. 권세 있는 양반은 이른바 괜찮은 명문가라는 선호 집안과 혼인해 자신들의 세가 쓸데없이 열등한 집안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막았다. 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은 양반 차이에서 더욱 극렬히 존재했다. 양반이라는 것은 또 노비와는 전혀 다른 거대한 벽이 존재하는 곳이다.

 

개체수가 증가하면 개체의 고질적인 병폐는 생태계 전반으로 전파되는 법. 양반, 그 중 대다수가 이미 맛보고 있던 절망은 이제 새롭게 양반으로 둔갑(?)한 사람들 덕에 대중적인 것이 되었다. 노비의 대다수는 평민이 되었고 다시 평민의 대다수는 양반이 되었다. 여전히 같은 자리다. 달려도, 달려도 그 자리인,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달리는 그들은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계속 달려야하는 붉은 여왕의 역설과 비슷하다. 끝이 없는 모방의 끝은 당연히 절망이다.

 

이제 그들은 달리기를 다른 방식으로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혹시 혁명이라 불리는 농민의 난일까. 그런데 과연 그럴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난이란 도저한 역사의 흐름에 잠깐 터지는 불꽃놀이와 다름없다. 흥미진진한 막간극. 그리고 달리기는 계속된다. 지금까지.

 

그들은 차별을 내면화 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러하듯이. 아직도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들을 차별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차별하는 것에 분노하면서. 자신이 앞에 있기를 원할 뿐, 자신이 뒤에 있지 않기를 원할 뿐, 차별이 아닌 것을 꿈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2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추적한 노비의 가계는 변화와 정체라는 모순적인 두 개념을 지니고 있다. 신분제 세상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표면적으로 신분제가 없는 지금 우린 왜 이렇게 치열한가. 변화이면서 정체의 알고리즘은 지금도 무한반복의 폐회로를 열심히 돌고 있다. 결론은 살기위해 죽자고 변하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학이 발전하고, 인류가 아무리 진보한다고 해도 이기적 인간은 변함없다.

 

대부분이 고졸이던 70, 80년대 이후 대부분이 대졸인 시대인 현재. 그리고 몇 년 후 맞게 될 대부분이 석사, 박사인 미래. 고졸이던 사람의 가계를 몇 십 년 추적하면 어떤 결과를 바라보게 될까? 조선 후기와 다를 수 있을까? 그 판단은 책을 읽어보시고 결정하시라. 책은 아주 좋은 길잡이가 돼 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