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도 소녀였고,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랫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고운 여인이 가정으로 들어와 투박하고 억센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우리에게, 처음으로 그녀들의 삶을 보여준 소설 <사랑의 터널을 헤쳐온 오래된 기억>. 40대 가정주부인 청숙의 눈을 통해 바라본 친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인생에 나도 같이 들어가 슬프고 애잔한 마음으로 역시 어머니를 떠올려 보았다.

청숙의 시어머니는 본명도 모르고 그냥 ‘쨉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어렸을 때부터 갖은 고생을 하며 배를 곯아온 까닭에 평생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또 자식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고생을 대물림 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것이 자식들과의 골을 만들고 결국 고립을 자초하게 되어, 늙어서는 봉양 한 번 못 받고 노인 요양원에 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청숙의 시어머니 일화를 통해, 자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헌신적이고 맹목적이 될 수 있는 모성에 대해 새삼 느끼게 되며 그에 비해 자식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청숙의 친어머니는 시어머니와는 반대로 일제시대에 여고까지 졸업하여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요조숙녀이다. 본연의 아름다움으로 뭇 남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가장 먼저 인연이 닿은 청숙의 아버지와 열아홉 나이로 혼인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녀 인생에 있어 어둠의 시작이었다. 여성으로서 그녀를 질투한 시어머니의 냉대와 구박 속에 평생을 기 한번 펴보지 못하고 숨죽여 살았던 것이다. 청숙은 언제나 심약했던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리며, 또한 서릿발 같았던 또 한 명의 여인 할머니를 떠올리며 어머니와 여인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두 여인의 공통점은, 인생이 결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평생을 억눌리며 살아온 연약한 이의 생이 슬프고 쓸쓸하게 끝나는 것은 서글프지만 어쩌면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일상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가 그랬던가. 어머니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이 책은 온전히 어머니를 위한 책이다. 아니, 어머니라는 ‘여인’을 위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