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드라마나 영화 등이 원작이 있는 경우 반드시 읽는 편이다. 모든 원작소설이 취향에 맞는 게 아닌데 거의 병적인 습성이다 보니 괴로워하면서 꾸역꾸역 읽는 경우도 많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에서 인터넷 소설이나 로맨스 소설의 판권을 사서 만드는 경우가 늘어났다. 생전 손을 안 대다시피 했던 분야였는데 이 때문에 한권 두 권 읽은 게 꽤 쌓였다. 만족하기는커녕 욕을 안한 적이 없었고 몇 권은 도저히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고개를 저은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킬링 타임으로 재밌게 읽은 한국 로맨스소설을 만났다. 정은궐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과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로맨스소설만큼 싫어하고 안 읽는 소설류가 역사소설인데 이 작품은 그 두 요소가 모두 있음에도 꽤 편하게 읽었던 책.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100만부 돌파 한국로맨스 소설을 보며
-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성균관에 여자 유생이 들어온다는 가정으로 쓴 역사로맨스소설이다. 100% 허구이기 때문에 평소 역사서는 읽어도 역사소설은 부담스러운 독자들도 마음 놓고 읽을 수 있으며, 근본은 로맨스소설이다.
- 다른 역사로맨스 소설과 비교해서 뿐 아니라 역사소설과 비교해도 엄청난 각주 량을 보면서, 그만큼 작가가 꽤나 시대적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어휘 선택에 신경을 썼고 공부를 했구나 느낄 수 있었다.
- 그래서 혹자는 정은궐을 '고증쟁이'라며 좋아하지만, 판타지 역사물로 재미삼아 즐겨야지 지식으로 깊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전개의 편의를 위해 정조 시대를 다루는 픽션물들이 흔히 그러듯 4색 당파 구도를 아주 단순하게 설정함
- 주인공은 노론 실세 좌의정의 아들 가랑 이선준, 몰락한 남인의 딸 대물 김윤식(희), 대를 잇기 위해 입양되었고 부유하나 정치적으로 유명한 가문은 아니라 자신도 무당파를 추구하는 여림 구용하, 소론 실세 대사헌의 아들 걸오 문재신
- 서체와 지식이 뛰어난 윤희는 가난한 살림 때문에 서책방에서 필사 알바나 과거장 거벽 알바를 하면서 사는데, 어느 날 아픈 동생 대신 과거를 봐서 자신의 입도 덜고 동생을 입신양명시켜 집안을 일으킬 생각을 한다. 그리고 과거장에서 선준을 만나는데.
- 과거 합격 후 성균관에 입성하고 탕평에 남다른 의지가 있고 대쪽 같은 성품의 선준은 보통 노론은 동재 서론과 남인은 서재에 있는 전통을 거스르고 동재를 고집한다. 그리고 윤희와 재신과 룸메이트가 되는데.( 재신과 용하는 선준과 윤희보다 1년 선배)
- 여자임을 숨기고 윤식으로 살아가는 윤희와 그런 윤희를 남자인 걸 알면서 끌리는 재신과 선준, 그리고 차례차례 윤희가 여자임을 알아차리고 성균관엔 비밀 사랑이 꽃피는데.
- 정사씬 등 성적 묘사, 동인녀 코드 등이 역시 삽입되나 수위도 비중도 높지 않다.
- 작가의 이름은 필명이며, 계속 작품을 내고 있지만 모든 신상을 비밀로 하고 있다는 게 특이사항(뭐 장르문학에선 이런 작가가 흔치만)
- 이례적으로 수만 부를 판매한 로맨스소설계의 기록적인 작품, 일찌감치 드라마판권이 팔렸고 몇 년 후인 2010년 KBS에서 드라마로 방영된다. 그러나 소설을 본 사람은 바로 알아차릴 만큼 이 소설의 속편인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의 몇몇 에피소드를 차용했음에도 제작진 측에서 부인했고, 덕분에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은 판권을 사려는 사람이 없어 출판사 측에선 을의 설움을 한껏 느꼈던.
- 결국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과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은 100만부가 돌파하였다. 특히 이 책이 이룬 쾌거는 기존에 로맨스소설이 여성향 야설이나 장르문학에서도 하급으로 평가절하 되어 왔는데, 성적 묘사나 가벼움은 낮추고 스토리텔링의 질을 높여 순수소설들과 비교할만한 수준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판매량 면이나 작품 질 면에서 한국 로맨스소설에 대한 재평가와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에 대해 재고하게 한 작품, 그리고 지하철 등에서도 당당히 펼쳐 읽고 40대 이상의 여성 독자들도 로맨스소설을 붙잡게 했다는 점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 하지만 전형적인 로맨스소설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잘 만든 로맨스소설' 이상 문학적으로 고평가할만하지는 않다. 리메이크 소스, 원 소스 멀티 유즈 측면의 접근이라든가 이 책의 파급효과 등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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