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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여자라는 정체성을 모두 가진 ’미스 엔’, 사랑을 말하다!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의 ’엄마’들이 있다. 자신의 첫 아이를 설레고 두려운 마음으로 키운 엄마(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있는가하면 자신 앞에 펼쳐진 세상이 두려워 아이와 함께 창문 밖으로 몸을 내던지는 엄마가 있고, 무언가에 빠져 자신의 어린 아이가 죽어가는 것조차 외면하는 엄마도 있다. 전경린이 그리는 ’엄마’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엄마의 집』에서 전경린이 그리고 있는 엄마는 모성애가 넘치다 못해 희생적이기까지 한 엄마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노윤진, 딸 호은은 그녀를 ’미스 엔’이라 부른다. 호은이 중학생이던 어느 날, 그녀의 엄마는 집을 나갔고 호은은 외가에 맡겨진다. 호은은 엄마의 집을 찾아가는 상상을 하며 엄마의 부재를 견뎌낸다. 엄마가 작은 집을 사게 되자 그 집에서 함께 살게 된 호은은 엄마에게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울음을 터트린다. 그 울음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나 실망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잘 지내고 있는 엄마와 아저씨 사이에 끼어들어 자신이 방해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학생이 된 호은은 일부러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어느날 불쑥 찾아온 아빠는 호은에게 재혼한 여자의 딸 승지를 엄마에게 맡겨달라고 부탁한 뒤 사라진다. 호은은 승지와 함께 엄마의 집을 찾는다. 처음 승지를 만난 엄마는 아빠의 흔적을 쫓아 이 도시 저 도시를 헤매지만, 결국 중학생인 승지를 전학시킨다.

친딸인 호은조차 함께 살지 않는데, 과연 엄마와 승지는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은 보란듯이 빗나간다. 중학생 답지 않은 눈빛을 가진 승지는 엄마를 친척 아줌마라 부르며 잘 따르고, 엄마 또한 여느 엄마들처럼 예쁜 옷을 사주고 머리 모양을 신경 써준다. 그것은 아마도 부재 때문이리라. 어릴 때 엄마를 병으로 잃은 승지는 누구라도 좋으니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호은이 어릴 때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엄마는 호은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을 대신 승지에게 해주며 아쉬움을 달랬을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모습의 엄마들이 있지만, 내 자식을 아끼는 엄마는 남의 자식 또한 그렇게 대하는게 아닐까. 그게 엄마들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승지를 친딸처럼 잘 보살펴주는 엄마를 보면 세상 엄마들은 다 그렇다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미스 엔’이라 불리는 엄마는 엄마라는 정체성도 갖고 있지만 여자라는 정체성도 잊지 않는다. 그녀는 호은도 사랑하지만, 호은의 아빠가 아닌 한 남자도 사랑한다. 그녀는 사랑을 조금 다르게 정의한다. "이 사람이라면, 내게 상처를 입혀도 괜찮아. 이 사람이라면, 내게 잘못을 해도 좋아."(p.204) 상대에 대해 그런 마음이 생기면 그게 사랑이란다. 또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너무 사랑하게 되면 그것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꾸역꾸역하며 살게"(p.234) 된다고도 한다. 엄마에겐 그 사랑의 대상이 바로 호은이었다. 엄마는 화가였지만 돈을 벌기 위해 돈되는 그림을 그렸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런 엄마를 보고 승지는 타락했다고 한다. 승지가 말하는 "타락이란, 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며 사는 것"(p.229)인데, 화가이면서 생계를 핑계로 진짜 그림을 그리지 않는 엄마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386 세대인 전경린 작가는 호은의 엄마 아빠를 최루탄 냄새 폴폴 풍기는 386세대로 그리면서, 지금의 세대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는다. 그 언급 속에는 질책이나 채찍질보다는 측은함이 담겨 있어서 괜히 마음이 흔들린다.

훗날 내가 청춘을 보낸 이 시대는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규정될까? 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오직 세속만이 문제가 되었던 비운의 청춘으로 규정되지 않을까? 국방의 의무보다 더 긴 시간과 대학원 등록금에 맞먹는 경비를 영어에 쏟아붓는 세대. 취업 필수인 영어에 매여 남학생들은 보통 육칠 년 이상, 여학생들도 평균 오 년여 만에 대학을 졸업한다. 대학 내내 취업 공포증에 시달리고 졸업 후에도 삼사년씩, 심지어 오륙 년 동안 취업전쟁은 계속된다. 직장을 잡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는 것이 두려워 휴학을 하고 용돈을 아끼기 위해 하숙촌과 고시촌에서 동거를 하며, 결혼할 능력이 없어 야동에 기대어 서른셋을 넘긴다.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로 삶을 영위해야 하는 88만 원 세대로 불리는 남루한 청춘들. 중년의 부모들은 자식의 앞날보다 자신들의 긴긴 노후를 더 염려하게 되었다. 훗날 누군가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역사책을 펼치고 울어줄지 모른다. 지독히 세속적이기만 했던 저성장시대의 우울한 청춘들을 위해. (p.217)

전경린이 그리는 엄마는 모성애가 철철 넘쳐 자식을 향해 무조건적인 희생을 쏟아붓는 것이 아닌, 그렇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자식 따위 신경쓰지 않는 것도 아닌 엄마와 여자의 정체성을 모두 가진 엄마여서 눈물만 쏙 빼놓는 엄마보다 훨씬 좋다. 우리 엄마들이 ’미스 엔’처럼 정체성을 찾아가는 엄마들이 되길 응원해 본다.

10-042. 『엄마의 집』 2010/05/23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