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와 마주하고 있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엘리손도.

아직도 신화와 전설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울창한 바스탄 숲과 계곡에서

참혹하게 유린당한 뒤 살해된 10대 소녀들이 연이어 발견됩니다.

유능한 여형사 아마이아 살라사르는 수사 책임자로 임명받곤

어머니와 같은 존재인 고모와 두 언니 부부가 살고 있는 고향 엘리손도를 찾습니다.

아마이아는 과학수사팀의 도움과 피살자 주변 인물들에 대한 탐문을 통해

살인범의 동기를 어느 정도 추정하지만 더 이상 큰 진척은 보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건 수사를 빈정대는 큰언니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작은언니의 갈등,

그로 인해 자꾸만 연상되는 잊고 싶은 유년기의 끔찍한 트라우마와 임신에 대한 강박,

엽기적 살인사건을 전설 속의 숲의 파수꾼 ‘바사하운’의 소행이라고 믿는 엘리손도의 분위기,

그리고 여자 수사반장을 못마땅해 하는 동료 남자 형사의 노골적 반기 등

사건 자체는 물론 사건 외적인 요인들로 인해 아마이아의 심신은 피폐해져 갈 따름입니다.

지지부진하던 수사는 새로운 단서와 목격자, 과학수사의 개가를 통해 급진전하지만,

진실이 그 윤곽을 드러내는 순간 아마이아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범인의 눈에 깃든 헛된 욕망과 비뚤어진 신념, 그리고 참혹하게 희생된 소녀들의 육체를 통해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트라우마의 조각조각이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애초 자신이 이 사건을 맡게 된 것 자체가 신의 장난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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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이성, 신화와 전설, 역사와 인류사, 그리고 비극적인 가족사와 참혹한 연쇄살인 등

한 그릇에 버무리기 힘든 코드들이 혼재해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신화와 전설이 여전히 일상 속에 잠재해있고, 원시성이 살아있는 자연을 품고 있는

작품 속 주 배경인 소도시 엘리손도는 – 실제로는 잘 모르겠지만 – 이러한 ‘코드들의 혼재’가

현실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는 곳입니다.

작가는 아마이아의 입을 빌어 엘리손도 구석구석을 ‘문화유산 답사기’만큼 상세히 묘사합니다.

더불어 인류사적인 관점에서 엘리손도의 역사와 여성들의 수난사를 언급하는가 하면,

신화와 전설에 관해서도 장문에 걸쳐 거의 전문서적 수준의 설명을 곁들입니다.

이런 몽환적인 배경 속에서 ‘너무나도 현실적인’ 연쇄살인이 벌어졌을 때

전설 속의 숲의 파수꾼 ‘바사하운’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주인공 아마이아는 과학과 이성에 입각한 수사를 진행하지만,

그녀 역시 엘리손도의 딸인지라 때로는 꿈과 환영을 통해 암시를 받기도 하고,

타로 카드의 주술적 힘에 기대보기도 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아마이아가 갖고 있는 지워버리고 싶은 유년의 기억과 트라우마는

임신에 대한 강박증과 함께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그녀의 자매들의 사연과 뒤엉키면서

수사에 전념해도 모자랄 아마이아의 정신을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FBI와 함께 콴티코에서 교육받을 정도로 인정받은 여형사지만,

그녀의 능력치의 절반은 ‘딴 세계’의 훼방으로 개점휴업이나 마찬가지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오랜만의 귀향이 준 불쾌감과 불안감, 자신의 트라우마와 자매들의 갈등,

그리고 과학수사의 일원으로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엘리손도의 신화와 전설이

사건의 진상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있음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억눌렸던 잠재의식과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고 맙니다.

방대한 서사와 인물들, 그리고 독특하다고 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의 조합에 대해

유럽의 출판사들은 물론 많은 독자들이 서평을 통해 호감을 표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적잖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기보다 이 작품에 대한 ‘호평’들을 통해 거꾸로 설명해 보면...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 소설 (출판사 리뷰)

경찰 수사와 인류학적 상상력을 통합시킨 (스페인 Erein 출판사, 바스크어판)

서스펜스와 신화, 가족사가 절묘하게 결합된 (스페인 Columna 출판사, 카탈로니아어판)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고, 범죄는 부차적인 것... (저자 인터뷰)

다양한 코드들의 혼재가 작품의 완성도와 문학적인 기품을 끌어올린 것이 사실이더라도

모처럼 만난 스페인의 특별한 스릴러를 기대한 독자에게는

엘리손도의 역사와 인류학적 유산에 대한 과도한 설명은 조금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사건 자체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더라도 중요한 정서적 배경이 된다는 점은 이해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림잡아 1/3(혹은 그 이상) 정도의 분량을 할애한 구성 덕분에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뭐지?’라는 자문을 수시로 들게 만들었습니다.

살라사르 가문의 비극적인 역사와 전쟁에 버금가는 자매들 간의 갈등 역시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과유불급이라는 인상을 줄 만큼 지나쳤습니다.

“전형적인 모계 사회에 대해 쓰고 싶었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고, 범죄는 부차적”이라는

작가의 고백대로 작품 속에서 소녀들의 연쇄피살은 정작 그리 무게감을 주지 못합니다.

자연히 범인에 대한 궁금증은 희석되고, 뛰어난 여형사 아마이아의 존재감은 희미해집니다.

아마이아를 놓고 “‘양들의 침묵’의 주인공 클라리스 스털링에 비견된다.”는 표현은

적어도 이 한 작품만으로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스페인에서 화제가 됐고, 영화화까지 결정된 바스탄 3부작의 첫 편이라는 외형에 비해

그다지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되진 못했지만,

남은 두 편의 작품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는 작가의 ‘욕심’이 조금만 덜어진다면,

그리고 뛰어난 여형사 아마이아가 활약하는 스릴러로서의 존재감을 되찾는다면,

외형만큼이나 알차고 재미있는 책읽기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