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나 기업이나 정부나 군대를 상대로 목소리를 낼 때, 우리는 사적인 변덕이나 한때의 취미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살아온 45억년 세월의 권위로 말하는 것이다!˝(137)

이 글을 읽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뭉클한 뭔가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제주강정마을의 구럼비 너럭바위가 파괴되던 날, 솟구쳐오르는 바위 파편과 폭약의 잔상들이 오래 전 핵폭탄이 터지던 그 끔찍한 장면과 겹치면서 오랜 세월 탐라의 역사를 지켜오던 역사가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지금 구럼비의 너럭바위 표면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공사진행이 더 빨라져버렸고 강정에서 지내던 외국인 활동가 2명은 짐도 없이 홍콩으로 강제추방을 당해버렸다. 오랜 세월 자연이 만들어 낸 화산섬의 일부는 그렇게 인위적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어떤 강한 파도와 태풍이 몰려와도 의연히 지켜내던 세월의 권위는 그렇게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파괴되어버린 것이다.
그 슬픈 역사의 현재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아픈 역사를 남기지 않기 위해 더 꿋꿋하고 당차게 불의와 싸워야 할 것이다.

파도가 거세어지고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면, 해마다 뉴스에서 탑동 방파제의 유실과 탑동 매립지의 피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위적으로 바다를 메워 그 시멘트 바닥위에 호텔을 지어대고 쇼핑몰을 만들어댄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피해인 것이다. 어머니와 그 뉴스를 함께 보고 있다가 그 옛날 탑동매립 반대를 하며 데모를 할 때 어머니는 내가 데모나 하고 다닌다고 구박을 했다면서 그러한 무지함이 지금의 제주도를 이모양 이꼴로 만들어놨다 라는 말을 농담반진담반으로 내뱉었었는데... 구럼비가 폭파되는 그 날, 폭음이 터져나오던 그 날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라는 물음앞에 할말이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의 나는 환경운동가들의 거센 항의와 과격한 투신으로 환경운동을 하는 모습이 낯설기만 했었다. 나무를 지켜내기 위해 나무 위에서 수십일을 살아가는 일, 거친 바다에 서슴지않고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들처럼 뛰어들어 동물을 보호하고 바다를 지켜내는 일.... 그 모든 일들이 과격한 투신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투신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는 중이다.

｀산처럼 생각하라｀는 아르네 네스, 존 시드, 조애나 메이시 등 열대우림 보호활동, 여성운동, 생태운동 등을 하는 활동가들의 에세이, 시와 시애틀 추장의 연설 등의 글로 엮인 책이다. 책을 읽기 전에는 지구환경을 지켜야 하는 당위성이나 생태운동에 대한 이론적인 공감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일까 짐작했었는데 이 책에 실려있는 글들은 오히려 각자의 체험과 활동을 통한 자연 그 자체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내가 그냥 일상적으로 넘겼던 물, 흙, 공기, 불, 동물, 식물.... 그 모든 것이 되어 세상을 느끼고 그 안에 하나가 되어가는 느낌을 명상하는 것은 낯설면서도 독특하고 꽤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이 글들이 나온것이 이십여년전이라 해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자연과의 일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세월의 흐름앞에 낡은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 옛날 열대우림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활동가들의 모습이 지금 강정마을의 구럼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속으로 뛰어들고 폭약이 설치된 바위로 걸어들어가는 이들의 모습과 겹쳐지는 아픔도 있지만.

오늘은 꽃샘추위도 지나가고 봄이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화창한 날이다. 아침 출근길마다 지나치는 다리 저 너머로 오늘따라 또렷하게 보이던 한라산의 모습이 생각난다. 어릴적에 읽었던 오스카 와일드의 큰바위얼굴을 떠올리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듯 보이는 한라산을 바라볼 때마다 자연을 닮고 산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날마다 산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산처럼 생각하는 자연의 마음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제 나는 45억년 세월의 권위를 일깨우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일어나야 할 때,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