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우주처럼 심오했던 남자, 백남준과 함께 한 삶에 감사한다.

 -에필로그 중에서-

  책은 저 한 줄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 구보타 시게코가 말하는 백남준과 함께한 삶, 사랑 그리고 예술' 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백남준에 관한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에피소드들을 읽을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잘몰랐던 백남준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라는 여자를 발견하게 해준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녀의 깊고 지극한 사랑에 감동했다.
  신문에서 본 그에게서 첫눈에 반한 후에 그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너무나도 지혜로운 길들을 걸어나가는 그녀를 보면서 저런 사랑을 하고 싶다, 저런 사랑을 해야겠구나 생각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사랑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그 남자를 잡을 거니?"
"나도 유명한 예술가가 될 거야. 그래서 이 남자를 꼭 잡고 말 거야."

 -'chapter 1. 달콤한 테러리스트' 중에서-
 

  구보타 시게코 역시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예술가이다. 뉴욕 현대미술관에는 2008년도에 열린 특별전에서 대표적인 비디오 아트 작품으로 구보타 시게코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 가장 눈에 잘 띄는 전시회장 입구에 배치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천재1적인 에술가로 불리는 백남준의 옆에서  끊임없이 자신만의 예술을 남기기 위해 고뇌하고 노력하는 모습 역시 그녀에게 있어서는 사랑하는 방법, 백남준의 곁에 있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것이 놀랍다. 
  사랑의 기술에는 그런 방법도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헌신했지만 자신의 존재를 완벽하게 희생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래서 이 가난한 예술가 연인의 작업은 그들이 사는 세상 안에서 행복하게 보인다.
  물론 그들은 행복했다. 

"자, 시게코! 이것봐. 우리가 77년 3월 21일에 결혼해서 '456'에서 저녁을 먹고 있잖아. 봐봐, 1부터 7까지 숫자가 다 있어. 이거 보통 상서로운 일이 아니라고."

-'caapter3. 뉴욕을 강타한 황색 재앙' 중에서-

 시게코, 우리가 젊었을 때 당신은 내게 최고의 연인이었어. 이제 내가 늙으니 당신은 최고의 어머니,그리고 부처가 되었어.

-'chapter 5. 부처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다' 중에서-

  책에는 백남준이 구보타 시게코에게 보내는  위트 넘치는 러브레터가 여럿 실려있다.
  남편에게 연애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단 한 장의 생일카드 밖에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물론 남자들은 대부분 편지를 못 쓴다!) 백남준의 장난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이 연애편지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책을 다 읽은 후의 또 한가지 수확이라면 전위예술에 대해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플럭서스니, 아방가르드니 하는 것들.
  사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그들의 퍼포먼스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퍼포먼스들은 이해받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기 보다 그 순간을 위해 행해지는 것들로 보인다. 물건들을 부수는 파괴적인 퍼포먼스라든가 개인적인 기억들로 가득차 있는 비디오 아트들은 미술이 어쩌면 이해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음악을 듣는 것처럼 그저 받아들여지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전에 현대미술전을 보러 갔다가 도대체 저건 '왜 만들었지, 의도가 뭘까' 따져가면서 보았던 것이 한편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 역시 중요하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가 더 중요한 것.

  
   일주일 동안 손에서 놓치 못했던 이 책은 어떤 면에서 보면 예술가의 가십에 더 가깝다.  지금껏 잘 몰랐던 그들의 사생활에 대해서 아주 많이 들려 주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단순히 가십으로 읽기에는 아주 큰 울림이 느껴진다. 두 사람 모두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tip.

  연인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백남준에 대해서는 그에 관한 또다른 책을 한 권을 더 읽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