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은 뭐랄까, 세상의 의미 없음과 지나간 것에 대한 후회와 다른 이들에겐 충격적일 일들이 그냥 소소한 일상처럼 다뤄진다고나 할까?

아무튼 하루키의 소설은 연애소설이다 -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읽은 [상실의 시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그리고  지금 독서후기를 쓰는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 관해서는 말이다.

 

'나' 하지메에게 세 명의 여자가 있다. 물론 그보다 훨씬 많은 여자들이 '나'를 스쳐갔지만 '나'는 마음에 깊이 담아두지 않았기에 그들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가벼이 생각했던 만큼 그들도 그랬으리라. 그러니 지나간 여자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지는 모른다.

'나'의 마음에 자리잡은 여자는 초등학교 5학년 말에 만나 중학교에 진학하고 헤어졌지만  '흡인력'을 느끼게 해주었던 시마모토, 고등학교 때 만나 섹스를 갈구했지만 기다려달라는, 기다릴 수 있지라는 질문에 약속을 해놓고 그녀의 사촌언니와 '정액의 마지막 한 방울'이 없어질 때까지 쾌락을 추구하다 상처를 준 이즈미, 지금의 나를 이해해주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시마모토와 지냈던 12살 시절 이후 행복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 지금의 아내 유키코.

 

아무래도 '나' 하지메의 마음 속에는 12살 시절에 만난 시마모토가 사랑이라는 단어에 들어맞는 여자일 것이다. 25년이 지난 어느날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나 25년 전에 나누지 못했던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하고 홀연히 사라진 시마모토는 혹 '나'의 그리움이 만들어낸 환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마모토는 하지메에게 '중간이란 것은 없어'라고 말한다. 장사 잘 되는 두 개의 재즈바 사장이고, 두 딸의 아버지인 하지메가 자신을 온전히 갖기 위해서는 지금의 모든 것을 깡그리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메는 그럴 수 있다고, 그러겠다고 말하지만 시마모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뜨거운 밤을 지낸 그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메의 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25년 전 자신을 홀로 남겨놓고 떠나버린 하지메를 용서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시마모토는 지난 25년 간 고독한 존재로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메 만이 사랑이었기에.

 

하지메가 시마모토에게 준 상처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상처를 준 여자가 이즈미다. 이즈미도 시마모토 만큼이나 하지메를 좋아했고, 남자라곤 하지메 밖에 없었나보다. 삼십대의 중반에 다시 만난 이즈미는 아직 독신이고,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없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표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박탈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이 하지메가 준 상처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이즈미가 살아온 세월 동안 받은 또다른 상처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지메가 지금의 이즈미를 만든 데에 하나의 원인이라는 데에는 부정할 수 없다.

 

지금의 유키코. 시마모토처럼 '흡인력'을 느끼거나, 이즈미처럼 어떤 목적을 갖게 끔 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저 중간인 정도. 이 정도의 여자면 되겠다 싶은.

그러나 결국은 유키코 밖에는 나의 얘기를 들어줄, 나를 용서해줄, 나와 함께 해줄 여자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메도 많이 괴로웠지만 한 번의 자살 경험이 있는 유키코에게도 커다란 아픔이었다. 그렇기에 자살을 염두에 두자 두 아이는 아무 걸림돌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을 가정한다고 해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중학교에 진학하고 이사를 갔지만 시마모토에게 가끔 놀러갔다면, 이즈미가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을 때 성적충동을 조금만 자제할 수 있었다면, 시마모토가 나타났을 때의 감정을 유키코에게 하루 빨리 고백했다면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테지. 그러지 못했기에 하지메의 지금 인생이 존재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