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달콤한 나의 도시'를 재밌게 봐서

오랜만에 나온 정이현 작가의 소설이라 망설임없이 읽게 되었다.

일곱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인데,

다 읽고 나면 왜 하나의 책으로 묶게 되었는지 이해가 된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라는 제목과도 꼭 들어맞는 내용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단면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덤덤하게 그려내고 있어서

책장을 덮고 나면 씁쓸한 기분마저 든다.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인 것만 같다.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

 

작가의 생각이 그대로 담긴 구절인 듯하다.

이런 시대를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들,

그것들을 소설로 써내기 위해 아팠을 시간들이 느껴진다.

 

# 아무것도 아닌 것

생각지도 못한 고등학생 딸의 출산.

딸의 엄마는 딸의 출석과 수행평가를 걱정하고 있고, 

아들의 엄마는 딸의 엄마로부터 전화를 받고 나서도

폭발한 프라이팬 뚜껑과 부동산 매매건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결국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 뿐인

미숙아로 태어난 아기의 동맥관 수술은 점점 미뤄진다.

아마도 딸의 엄마는 미뤄진 수술로 더 이상 아기가 견디지 못하고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니, 그걸 바라고 있었을지도.

 

# 서랍 속의 집

내 집 마련이라는 숙명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충과 현실.

시세보다 싸게 나왔다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부부가 덜컥 계약을 해버린 집은,

와이프가 목을 매서 자살한 후 혼자 살던 남자가

밤마다 온 동네 쓰레기를 집에 쌓아서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되어버린 집이었다.

어떤 집인지 알면서도 좋은 매물이라고 부부를 꼬드기는 중개인이야말로

상냥한 폭력을 휘두르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나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소설 두 가지만 적어본다.

충격적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더 슬픈 현실이다.

사건사고를 보도하는 뉴스 기사를 보면 이것보다 더한 일도 비일비재하니까.

호의라고 생각했던 타인의 친절이 사실은,

거짓과 위선으로 포장된 폭력임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배신감과 상처.

마치 예리한 종이 끝에 베인것처럼 쓰라리고 깊이 아픈 느낌이다.

나 자신만큼은 웃으며 칼날을 내미는 사람은 되지 않도록,

하지만 상냥한 폭력에 무차별적으로 당하지 않도록

단단한 사람이 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