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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자정 넘게 이어졌던 술자리의 여파가 때 아닌 코감기-목감기의 복합 공격으로 이어져 며칠을 비몽사몽 간에 보냈다. 어차피, 빈둥거릴 연휴를 틈타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떼고, 손이 가는대로 집어든 것이 바로 이 '시로 프로젝트'. 우편으로 받은 다음에 첫 장을 슬쩍 들여다보고 그대로 던져둔 참이었다. 끔찍한 일가족 살인사건의 시종(始終)을 수년간의 조사로 치밀하게 더듬어 간 끝에 미국 현대 르포르타주 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개척한 트루먼 카포티의 대표작(두껍기도 하다) 일독이 남긴 묵직한 부담감에서 벗어나기에는 딱 적당한 킬링타임용 소설이 아닌가 싶었다. 사실, 그랬다. 킬링타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굳이 줄거리 소개 따위는 패스하자. 1편 '블레이베르크 프로젝트'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나치 독일의 생체실험을 유산으로 삼은 다국적 컨소시엄이 감행한 모종의 프로젝트를 이스라엘 첩보조직 모사드와 그를 대표하는 비밀의 전사 '에이탄 모르그'의 대결이 펼쳐져 미완의 상태로 끝났을 터이다. 3편인 '모르겐스테른 프로젝트'는 책의 뒷날개에 소개된 대략적인 줄거리를 보자니 영화의 프리퀄처럼 다시 과거로 돌아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생체조작 실험을 통해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전사로 성장해,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나치 잔당의 척결하는 임무를 맡게된 배경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2편은 또 다른 에피소드 소개를 통해 시리즈의 마무리를 위한 3편의 징검다리 역할 정도로 입지가 줄어버렸다.

그래서인지 애초 기대했던 '731부대'의 잔재는 영 맥을 못춘다. 저자는 731부대가 자행한 생체실험의 흉악함이 나치의 엇비슷한 실험 따위는 애들 장난 수준에 불과할 정도였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나치의 잔재는 세계적인 세력으로 규합되어 반인류적 범죄를 자행하는 악의 축으로 설정된 반면, 일본군 부대의 잔재는 오히려 자신들의 반인류적 범죄가 단죄되기는 커녕, 승전국 미국의 이해관계를 위해 은폐되고 이용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생화학 범죄 재현을 통해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양심적 범죄단체로 만들어 놓고 있다. 결국 '시로 프로젝트'는 시리즈 전체를 위해 변죽만 살짝 울리고 만다.

책의 표지 상단에는 '프랑스 스릴러의 대표주자 다비드 카라'라는 큼직한 활자의 PR문구가 뽐내고 있다. 그래서 책을 덮은 다음, 과연 '프랑스 스릴러'의 대체적인 특징은 뭘까 싶어서 이리저리 검색을 해봤다. 애당초 스릴러라는 장르에도 그닥 필이 꽂히지 않는 사람이니, '프랑스 스릴러'란 그저 외계어나 다름없는 얘기다. 하지만, 한참의 검색을 통해서도 딱히 떨어지는 답변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략 이것저것 줏어든 몇 사람의 개인적 견해 조각들과 평소에 느끼는 프랑스라는 이미지를 뒤섞어 대충 두드려 맞춰 본다. 프랑스 스릴러란, 프랑스 전통 문학의 깊이와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프랑스적인(참 애매한 표현이긴 하지만, 뭐랄까, 감각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을 갖춘 스릴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내가 봐도 대충 그럴 듯한 정의로 보인다. 국내에는 피에르 르메트르, 막심 샤탕.. 같은 작가들의 책이 여러 권 소개되었다는데, 읽어본 적이 없으니 나로서는 비교대상이 전혀 없는 셈이다.

어쨌건, 처음으로 접한 '프랑스 스릴러'지만, '프랑스 스릴러의 대표'를 운운하기엔 지나치게 과한 마케팅 공세가 아닌가 싶었다. 실상 '시로 프로젝트'에는 물리적으로 프랑스적인 요소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을 수 없다. 미국과 체코, 아일랜드와 폴란드... 현재와 과거를 무대로 복잡하게 넘나들며 정신없이 퍼즐 맞추기를 해나가지만, 대체 그 어디에서도 프랑스와의 연관을 찾을 수 없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프랑스 스릴러'는 커녕, 그냥 한 편의 헐리우드 액션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스피디한 장면전환은 박진감 넘치는 미국 액션영화의 서사구조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고, 문장은 독자들로 하여금 영상 이미지를 그리게 하기 위한 부수적 역할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과 몇몇 주요 등장인물을 제외한 엑스트라들은 자신이 등장한 무대의 배경 설명을 위해 짧게 존재하다가 가버린다. 에필로그를 비롯해 모두 37개로 챕터를 잘게 쪼갠 이유 또한 이 소설을 큰 어려움 없이 영화 촬영을 위한 콘티로 개작할 수 있게 한 저자의 아주 친절한 배려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기욤 뮈소가 그랬듯이 다비드 카라 역시 미국 만화와 액션영화, 비디오 게임에 열광하며 성장기를 보낸 세대인만치 그 스타일에 있어 미국적 B급 문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을 나무랄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프랑스 스릴러'를 강조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프랑스 스릴러'라고 하면 책이 더 잘 팔리기 때문일까?

1960~80년대초, 대학생들을 비롯한 국내의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는 프랑스문화원을 물방개처럼 들락거리며 때묻지 않은 예술성과 감수성을 간직한 프랑스 영화를 탐닉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었다. 미국영화의 속물성과 미국중심적 세계관의 강요에 신물이 난 나머지 그를 대체할 고급 문화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하지만, 그 프랑스 영화도 헐리우드의 거대자본이 밀어붙이는 대량생산-대량소비적 시스템 앞에 맥없이 꼬꾸라졌었다.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 문학 역시 마찬가지로 쇠락의 길을 걸었구나 하는

씁쓸함을, 처음 읽은 '무늬만 프랑스' 스릴러를 통해 맛봤다면 지나친 비약이고 독설일까.

P.S.

1. 최소한의 고증과 연구가 아쉽다

이전에 '007 어나더 데이'에서 북한에 침투한 007 피어스 브로스넌이 북한군에게서 빼앗아 입은 얼룩무늬 군복에 한글로 된 '창천 1동대'라는 마크가 달려있어 수많은 한국팬들의 실소를 자아낸 바 있었다. 설렁설렁 넘어간 고증의 문제였다. 프랑스어 원판의 표지 디자인을 갖다 쓴 이 책의 표지 디자인을 보자니 그때의 실소가 떠올랐다. 일본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총과 칼, 그리고 한쪽에 '大阪每日新聞'이란 한자가 뒤집힌 채로 놓여있다. 마치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이 '이시이 시로' 혹은 '731부대' 등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칫하다가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기 딱이다.

"표의문자는 일본어였고, 그 의미는 '시로의 아이들'이었습니다......" (P. 236)

체코의 파르두비체 근교의 평화스런 마을주민들이 어느날 갑자기 생화학 테러로 몰살당한다. 참혹한 현장에 남겨진 테러리스트가 남긴 표식이 바로 그 '표의문자', 말하자면 한자라는 얘긴데.. 작가나 출판사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그 정도의 일본어야 금새 파악할 수 있었을 테고, 표지 디자인에 그 글자를 집어넣었더라면 훨씬 어울리는 디자인이 되었을 터이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 ^^;

일본의 개항에 이은 도자기 전파를 통해 유럽에 자포니즘 열풍을 일어났고, 특히 회화분야에서 일본의 전통회화인 우키요에로부터 모네와 고흐를 비롯한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크게 영향을 받은 바 있다. 150년이 넘는 프랑스의 유구한 일본사랑 역사 역시 하나의 일시적 현상에 불과했던 것인가 의심을 품게 된다.

2. 어차피 킬링 타임용 소설에 로맨스 빼면 남는 건?

비디오 세대답게 소설적 서사 대신 영화적 이미지즘에 경도된 다비드 카라씨... 1편에서 서로 반대편의 입장에서 죽을 둥 살 둥 싸웠을 두 호적수 - 에이탄 모르그와 엘레나 쿠릴옌코 - 사이에 묘한 감정의 기류를 만들어 놓는다. 둘은 종내 서로에 대한 이해와 호감의 감정으로까지 발전하는데, 왜 이걸 하룻밤 끈적한 로맨스로 이어가질 않았을까? 미국의 액션영화적 내러티브에 러브신이 빠지면 앙코 없는 찐빵이 된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