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그야말로 정의롭게 나섰다가 인생이 꼬여 암울하던 어느 평일 오후, 「본 아이덴티티」라는 첩보영화를 보면서 일명 ’요원‘이라 불리는 정보 요원과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정보원의 실체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계기가 있었다. 아주 잠시. 
  모 일간지에 소개된 『잿더미의 유산』 서평을 보던 날, 나는 사전(辭典)처럼 두터운 1천여쪽에 달하는 책두께나 3만5천원이나 하는 책값보다는 그 옛날 영화관에서 조국에서 버림받은 정보요원 ‘맷 데이먼’의 안타까운 처지가 떠올라 선뜻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세계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이라니...

  ‘첩보영화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을 좀 더 적나라하게 파헤친 박진감 넘치는 글인가?’....지레짐작하며 즐거워했다.

  『잿더미의 유산』은 모든 국가가 저마다의 수준에 맞게 운영하고 있는 정보수집과 정보를 관리해 온 방식에 대한 고백서이다. 
  특히 전세계 민주주의 수호국을 자처해 온 미국이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고 싶다’는 소박한? 책임감에서 시작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지난 60년동안 전세계 곳곳의 전쟁과 독재를 유지, 관철 시켜 온 조직이었음을 드러내는 고백서이다.

  소련이 건재했던 냉전시대에는 공산주의 파급을 막는다는 미명하에, 소련이 붕괴된 후에는 이슬람제국의 무장세력 저지를 명분으로, 독재국가를 지원하고, 무기를 공급하며 내전을 부추기고, 잘못된 정보로 죄없는 민간인에 폭격도 무수히 불사했다는 이야기가 CIA의 내부 조직 변화와 더불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미명하에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고, 가장 많은 테러와 살인을 저지른 조직이었음을 파헤친 고백인 것이다.

 

  약2백여쪽에 달하는 ‘저자주’(책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별도 정리)는 남겨놓은 채, 798쪽에서 책읽기를 마쳤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미국이라는 나라가 참으로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토록 많은 돈을 들여 정보를 수집했으면서도 정작, ‘사실’ 근처에는 얼씬도 못했다는 고백, 60여년의 비밀정보활동 가운데 성공사례보다는 실패사례가 더 많고 익숙하다는 사실도 의아스럽지만, CIA라는 정보조직의 ‘메모’까지 한 기자(팀 와이너)에 의해 들춰지고, 책으로 엮어져 전세계에서 출판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재밌게 여겨진다.

  그리고 이토록 공개하고, 공개되도록 방관하는 그 ‘이면’은 무슨 작전이 숨어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여전히,  정보수집과 첩보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하게 인간의 인권을 유린하면서도 너무나도 당당하기만한 ‘국가’라는 존재에 대해 화가 치밀고, 분개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일까?

  새삼 ‘필요악’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며 이해하고 싶어지는 것은 왜 일까?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며, 공산국과 대치상태인 우리나라는 과연 ‘정보’와 ‘공작’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인지 오히려 궁금해지는 것은 왜일까? 비밀정보활동이 필요한가?하는 생각은 뒤늦게 떠오른 생각이다.

  『잿더미의 유산』을 읽으며, 무뎌진 내자신의 민주적 감수성에 대해 새삼 반성하게 된다. 세월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