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다른 얘기지만, 어릴 때 월간 소년중앙 같은 만화책에서 본 투명인간이 기억난다. 혼자 투명인간이 되는 옷을 뒤집어쓰고 거리에 나가 못되게 굴던 친구도 때려주고 가게에서 호빵 같은 걸 훔쳐 먹기도 하던 그야말로 나이브한 만화 속 이야기. 나에게도 투명옷이 생긴다면 뭘 할까 고민했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찐빵 같은 걸 마음껏 훔쳐 먹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누구랑 부딪히면 어떻게 하나 하는 소심한 마음에 상상도 오래하지 못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뿐 아니라 누구나 다 여러 번 상상했을 것이다. 정말 눈이 갑자기 안 보이면 어떻게 하나. 평상시 익숙했던 것들이 눈 하나 멀어지면서 얼마나 낯설고 힘들게 바뀔까? 세상 사람들이 다 눈이 멀어지는 상황이 온다면…, 과연 온다면! 눈이 멀거나 말을 못하거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말을 못하는 게 낫겠어, 음악을 들어야 하고 책을 읽어야 하니 차라리 말을 못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한심한 생각까지. 

인간이라는 동물이 ‘문명’이라는 겉옷을 하나씩 벗겨가는 과정, 그 심난한 프로세스가 이 책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처음부터 동물로서만 존재했다면 겪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눈 하나 멀어지면서 사람들은 그 동안 쌓았던 도덕이나 교양, 참을성, 부끄러움, 배려, 사랑, 연민, 규칙, 질서 등을 철저하게 잊어간다. 대신 욕망만 남는다. 무엇보다 식욕, 성욕, 지배욕과 같은 생존본능만 남게 된다. 이 책의 하나님은 무슨 생각인지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눈 멀게 하고 일정기간 동안의 변화과정을 지켜본다. 사람들이 제일 먼저 포기하는 건 씻고 꾸미는 것 등에 대한 위생관념이고 그 다음은 음식에 대한 취향을 버리고, 그 다음엔 성욕을 채우기 위해 도덕을 버리고 무엇보다 그 와중에 나름의 체제를 구축한다. 총을 가진 자가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른다. 유일하게 의사의 아내만이 눈이 멀지 않아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다. 그들이 격리수용소를 탈출해 의사의 집으로 돌아와서 비를 맞으면서 그간의 때를 벗기고 샤워를 하면서부터 사람들은 다시 동물성을 버리고 인간으로 되돌아온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라는 성수를 맞고 인간성을 회복한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뭘까, 인간이란 어떤 존재라는 걸 뼈아프게 되돌아보자는 의도일까?

읽는 내내 ‘묵시록’이란 말이 떠나지 않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요 몇 달 동안 계속해서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는 책이다. 다들 어떻게 읽으셨어요?

▣ 선을 행하다 보면 언제나 함정에 빠지기 마련이고 죄와 악을 행하는 자는 대체로 억세게 운이 좋다. (41면)

▣ 사람의 진짜 집은 그가 잠자는 곳 (9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