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님이 세상을 타계한지 5년이 지났다.

문학계의 큰 별이 졌다는 소식을 엊그제 들은 것 같은데...5년이라니.

지나간 세월은 언제나 문틈을 지나가는 흰 말 처럼 빠르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박경리 선생님 하면 [토지]가 대명사처럼 떠오르긴 하지만, 토지 이전에도 많은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해 왔고 타계하시기 전엔 두어 권의 시집도 내셨다.

 

[토지]가 가지고 있는 문학사의 업적이야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주춧돌처럼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비단 [토지]가 아니더라도 그 분의 작품 세계를 평가할 좋은 작품들이 많이 있다는 걸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

토지를 읽어 보아야 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토지가 가지고 있는 분량이 주는 압박감과 지구력을 갖고 덤비지 않으면 못끝낼지도 모른다는 중압감으로 인해 감히 바라만 보고 있는 독자들이 있다면, 먼저 박경리 선생님의 단편들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시대를 짚어보는 예리한 통찰력과 인물들의 심리, 흡인력있는 이야기의 전개에 빠져들다 보면 박경리 선생님의 저력과 문학적인 내공, 오늘날의 토지가 어떻게 토지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는지의 이해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쓴 작가의 책이라면...하는 생각와 함께 10권의 시리즈가 그리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펴면 곧 읽어진다는 것을 알게 될테니!!

 

[표류도]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연륜이 있는 소설이라는 걸 알고 놀랬다.

1959년 현대문학에 2월부터 12월까지 연재되었던 소설인데, 이듬해 영화로 제작되었던 작품이기도 했던걸 작품해설을 보고 알았다.

영화의 주인공이 문정숙, 김진규, 최무룡, 엄앵란, 허장강...등이었다니, 실로 기라성같은 배우들이 출연한 당대의 최고 배우가 출연한 최고의 영화였으리라 짐작된다.

 

이렇듯 오래되 소설임에도 읽는 동안 내용의 신파성이나 인물들의 식상한 구태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것도 신선한 충격이다.

1959년이면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데 (나도 연식이 좀 되는 사람임에도...) 50여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주인공이 느끼는 마음의 흐름들이 내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분명 불륜을 다룬 사랑이야기인데, 윤리의 가치관을 뛰어넘어 사랑에 대한 진정성을 생각해 보게 하고 불륜에 대한 세상이 들이대는 도덕적 잣대가 사람이 가진 천 가지 감정을 정확히 계량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저울인지도 생각해 보게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감정이라는 것도 어떤 기착점을 찾지 못한다면 언제나 표류하기 마련이고, 그 감정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또한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게 인생사이니...[표류도]는 이런 우리의 삶을,사랑을 현회와 상현, 광희와 민우의 사랑을 통해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까지 현회가 행복해지길 바랐다면 나는 신파를 신봉하는 사람인 것일까?

 

박경리라는 큰 이름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 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