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작품을 처음 만났던 20대 초반, 그 때는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들, 손에 잡힐 듯 하지만 흐릿한 이미지.. 나와는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듯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날카롭고 강렬하기만 했다. 그래서 일탈 그 자체가 매혹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좀 더 나이가 들어서 읽게 되었을 때는 이상하게 몸도 마음도 아팠던 것 같다. 나와 상관없던 막연한 이야기는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내려와 마치 누군가 거울을 들이민 듯, 눈팡에 또렷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그녀의 이야기는 내게 애증이 남은 옛 연인의 기억처럼 가슴 한 켠에 묵직하게 담겨져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풀밭 위의 식사>는 이제 조금 담담하게 내게 다가왔다. 생의 오랜 시간을 돌아 돌아도 어쩔 수 없는, 하지만 부질없다고 버리기에는 어쩐지 애처로운 쓸쓸함이 한껏 묻어난다. 지상에서 조금 떨어져 부유하던 인물들은 여전히 흔들리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듯 싶어 졌다. 여전히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지만, 적어도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게 된 것처럼 싶다. 그래서 이번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조용하지만 강인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세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지만, 어쩌면 그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16살에 봉인된 비밀과 그로 인해 억압된 욕망과 금기를 간직한 누경은 바스라질 듯한 인물이다. 섬세하고 연약한 그리고 유리를 다루는 그녀의 일은 어쩐지 아름답지만 쉽게 깨어질 듯 한 그녀의 삶과 닮아 있다. 오래도록 그녀의 사랑이자 욕망의 대상인 강주는 어쩌면 금기를 뛰어넘고자하는 그녀의 의지가 산물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

이 책에 처음으로 밑줄을 그은 문장은,   사랑에 대한 미감을 상실한 것 같은 무미건조한 헛헛함을 자주 느꼈다. 모든 것엔 상미기간이 있는 것이다.(12) 였다. 사랑에 대한 상미기간이 만료된 나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문장들로 내 가슴에 만찬을 차려주었던 이 책. 참 많은 문장들에, ’공감하기’ 버튼을 클릭할 수 없는 대신, 빨간 밑줄들을 그어주었다. ’공감’이라는 단어가 주는 포만감으로 행복했다.   행복하면서 쓸쓸했다.   외로운 사랑을 하는 누경과 기현의 위로 자꾸 내 모습이 겹쳐지는 까닭이었다.   인생이 고독할 거라고 했다. 모든 것이 마구 흘러가버릴 거라고 했다. 아무것도 곁에 머무는 것이 없을 거라고 했다.(15) 이 말을 들은 이는 기현이었던가, 나였던가? 기현의 손금을 봐 준 어떤 이가 기현에게 한 말이었고, 나의 사주를 봐 준 어떤 이가 내게 한 말이기도 했다. 천성적으로 고독하다고 했던가? 평생 외로울 거라고 했던가? 천성적이든, 평생이든, 고독이든, 외로움이든, 어쨌든, 혼자라는 거지. 아무것도 곁에 머무는 것이 없을 거라는 거지. 기현처럼, 나도. 한 시인이 자신은 슬프게 태어난 사람이라 했지. 남들보다 슬픔의 함량이 높은 사람이라고. 나도 그래요. 나는 고독의 함량이 높은 사람이에요.     ……, 알 수 없는 감옥에 갇힌 포로라고 말했다. ……, 실의에 빠진 채 취미도 없이 홀로 늙어갈 가여운 여자라고 말했다. ……,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다 살아버린 노파같이 이미 텅텅 비었다고 말했다. ……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구제불능의 잠을 잘 여자라고 말했다.(35) ……, 어떤 남자는 누경을, ……, ...

풀밭위에서의 식사를 떠올리자면 어릴적 소풍이 그것이다. 그 흔한 돗자리도 없이 그저 풀밭에 철퍼덕 앉아 김밥과 사이다, 과자 한 봉지를 꺼내놓고 네 것, 내 것없이 나눠 먹으며 철없이 웃던 기억. 김밥이야 양은 도시락에 넣으니 괜찮았지만, 사이다는 달랐다. 지금처럼 다양한 용기가 없던터라  병에 든 사이다는 늘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보자기로 한 번 떠 싸서 소풍 가방에 넣어야했다. 그 때는 병 속에 사이다만 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병 속에 사랑도 담길 수 있음을 알았다. 작은 부딪힘에도 깨어지기 쉬운 병 속에서 불안해 하는 사랑도 있음을 말이다. 누경의 사랑처럼.      열 여섯의 누경은,   자신이 저항할 수 없었던 불행한 사건을 겪게 되고 그 순간부터 풀밭에 버려진 인형안에 자신을 가둔다. 누경은, 강주가 자신처럼 헝겊인형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강주에 대한 누경의 사랑은 동질성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동질성과 연민으로 다가간 강주와의 사이에서 정신적으로 공유할 공간을 찾지 못한다. 강주를 통해 점점 짙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애초에 사랑조차 원하지 않았다." 는 고백이 몹시도 아팠다. 누경에게 있어 강주는 "공유와 공속, 공감, 공모, 개념으로 재단되지 않은 그 어떤 영역..."의 사람이었다. 다가가면 갈수록 잡힐듯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공허한 사랑이었다. 강주가 빠져나간 자리에 남겨진, 메마른 누경이 바스라질것만 같다.     "부인이 무척 소중하군요." " 내 짐이야." - 그 순간 나는 전부를 이해해버렸다. 강주와 죽은 아버지가 교차되면서 혼란스러...

푸르른 풀밭위에 마네의 작품 '풀밭 위의 식사'가 하얀선으로만 그려져 있다. 이 책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 책을 읽기전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일 것이다. 정장을 한 두 명의 남자와 벌거벗은 한 명의 여자. 마네의 그림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당한 모습의 여자였는데....  '전경린'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오래전에 읽었던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그리고 단편이 실렸던 '물의 정거장', 모두 좋은 느낌의 책이었다. '풀밭 위의 식사'를 펼쳐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을수록 작가의 표현력이 풍부한 문장들이 펼쳐진다. 그녀의 문장들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감성적이다. 배경묘사와 심리묘사도 이렇게 적확한 어휘들과 구절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때론, 너무도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식어들이 많이 달라 붙는다. 바로 그것이 전경린의 작품을 읽는 맛이라고나 할까? 누경의 숨소리는 보풀이인 낡은 스웨터의 실을 당겨 푸는 것만 같은 소리였다. 그 숨소리를 따라 옅은 딸기향과 젖은 낙엽향과 마른 버섯향들이 새어나는 것 같았다 (p13) 자신 속에 매몰되어 버린 나, 각질처럼 떨어져 나간 나. 소화되어 배설된 나, 눈물과 땀과 분비물로 흘러나간 나, 머리카락과 손톱과 발톱으로 잘려나간 나, 섬유질만 남은 나뭇잎처럼 나로부터 증발된 나, 겨울날 창문에 낀 성에처럼 결빙의 시간을 안고 녹아내린 나... (p73) 꽃잎처럼 겹겹이 피어나고 향기처럼 상대에게 퍼져 나가는 연인의 눈동자 (p109) 금지된 상자가 열린 것, 영혼속에 갇혀 있어야 할 욕망 (p189)     "'보풀이 인 낡은 스웨터의 실을 당겨 푸는 것만 같은 소리'는 과연 어떤 숨소리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처럼 모든 사물과 사건과 심리묘사가 다채롭다.  사...

전경린 작가의 소설 <풀밭 위의 식사>는 내가 읽은 그녀의 첫 소설이다.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술집에서 한 기현은 누경이라는 한 여인을 만난다. 팔이 없는 비너스와 누경을 비교하며 기현은 그녀에게 점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과의 관계에 익숙하지 못한 여인이다.  누경의 삶은 16살 전후로 완전히 뒤바뀐다. 꽃다운 나이인 16살... 소녀에서 여인이 되는 나이에 그녀는 커다란 암흑의 사건을 맞이한다. 그 후 16살까지 자신에게 따뜻함을 주었던 인물인 서강주에게 집착한다. 이 소설은 누경의 일기형식으로 표현된 문장이 많이 등장한다. 일기라는 형식을 빌어서 누경이라는 인물의 상처 하나하나를 끄집어내려는 작가의 노력이었으리라. 외로움에 익숙해져버린 누경,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혼자인것이 낫나고 여기는 그녀를 보며 누경의 아름다웠던 16살이 생각났다. 다 커보지도 못한 나이에 인생의 지독한 상처를 경험한 누경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고 내가 그녀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어릴적 자신에게 위로를 주었던 남자가 결혼을 하던날 일어난 끔찍한 사고.... 누경이 서강주와 재회하고 운명의 하루가 그들 사이를 섬광처럼 스쳐갈 때, 그들은 어떤 감정이였을까? 가정이 있는 남자인 서강주와 누경의 만남은 쉽게 규정짓기 힘든 감정이었다. 자신의 상처가 시작되기 전에 행복을 맛보게 해주었던 남자에게 가졌던 감정은 그냥 사랑이라는 한마디 말로 끝내기는 어렵다. 그것이 사랑이든, 보살핌이든 상처에 대한 고름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준것이 서강주였던 것이다. 서강주를 보면서 누경은 과거의 상처받던 영혼에서 자유로와지고 싶었으리라... 기현이 누경을 찾아오고 흐느껴 울던 장면도 인상적이다. 자신에게 이별통고까지 했던 누경을 정말 사...

사는게 시들해지고 힘겹게 느껴질 때, 사진처럼 꺼내어볼 수 있는 사랑의 추억 한자락만 있다해도 고단한 삶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다. 그 사랑이 가슴 시리도록 아픈 사랑이었든 예쁜 추억으로만 가득한 사랑이었든, 시간은 아픈 상처는 희석시키고 이쁜 추억만 남겨주는 마법을 부려주니까.   "네 눈이 반짝이는구나.네가 웃으니 행복해진다.네가 기뻐하는 것이 내겐 가장 중요해." "정말 가장 중요할까요?" "가장 중요해." "어디에 중요하죠?" "우리 관계에,내 생애에,아니 내 심장에……"그러나 이 아름다운 말이 거품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없어도 그의 심장은 변함없이 뛸 것이다.  - 풀밭 위의 식사 P189 중에서 발췌 - 혹여 달콤한 거짓말이라 해도 이런 말을 속삭여주는 남자라면 나도 한번쯤 누경처럼 아픈 사랑이라 해도 한번쯤 꼭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대사들이였다.  ’나한테도 이런 가슴 뛰는 사랑이 있었던가?’ 누경과 서강주의 사랑을 지켜보면서 내내 든 생각이다. 아무리 곰곰이 떠올려봐도 나에게는 이토록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사랑은 없었던 것 같아 부럽고 아쉬운 마음 가득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 먼 친척 오빠, 그것도 유부남인 서강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가혹한 운명을 나는 가지지 않게 해준 하늘에 감사하기도 했다. 사랑하지만 사랑한다 고백할 수 없고 전화하고 싶지만 전화할 수 없고 손 잡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것조차 남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아픈 현실. ’옛날 같으면 이모와 조카가 결혼하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먼 친척 오빠랑 사랑 좀 했다고 그게 무에 대수냐고 ...

싱그러움이 묻어나며 생명력을 줄것만 같은 푸르름...  단순히 책의 표지만을 바라보면 무성한 풀밭과 파란 하늘, 그리고 그 위를 떠다니는 하얀 양떼구름이 연상되면서 밝고 생명력이 넘치는 따스한 봄날이 떠오른다. 하지만 표지에서 한장 두장 책장을 넘기다보면 처음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편안하고 축복받는 사랑...  흔히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그 사랑을 기대해보았지만 내가 접할 수 있었던 사랑은 조금은 어두운, 그리고 세상에 알려지면 손가락질 받을 슬픈 사랑과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아픈 사랑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사랑이 슬프고 아프다 여겼던것은 내 마음이 닫혀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항상 사랑을 시작하면 상대방을 나 자신보다 사랑해서 행여 실수라도 할까봐, 만나기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실망하게 만들까봐 늘 깨지기 쉬운 유리마냥 조심하느라 사랑이 어려웠던 나. 그런 내 모습이 떠올라져 조금은 멈칫거리며 읽어나갔던 책 <풀밭 위의 식사>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죄가되고 아픔이 된다면 그 사랑은 잘못된 사랑인걸까?  나는 내 사랑이 좋아서 사랑하는데 내 사랑을 잘못된 사랑이라 바라보며 남들이 비난한다면, 그 사랑은 해서는 안되는걸까?  사랑에 대해, 아니 어떻게 바라보면 성에 대한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누경. 그리고 그녀의 혈연이자 사랑이었던 유부남 서강주.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한남자 기현. 이렇게만 나열하면 누경은 잘못된 사랑을 하다가 그녀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랑 기현과 인연이 닿게 되어야하는 구조이다.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순조로운것만은 아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 그리고 일방이 아닌 쌍방향적인 사랑이 이루어지고...

사막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여자, 누경... 누경. 그녀는 사막의 한 가운데 서 있다.  기름지고 비옥해서 씨를 뿌렸다가 곡식을 거둬들이는 농토인 땅이나 건물을 올려 많은 많은 수익을 내는 도시의 땅이 아닌  심심하고 밋밋한 사막의 땅. 그 땅엔 가끔 바람이 불지만 그녀는 언제나 목마르고 쓸쓸하다.  기다림과 목마름이 계속되던 그녀의 삶 속에 "같이 섬에 가실래요?"라고 말하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 옛날 그 남자처럼. 그와는 가지 못했던 약속의 땅, 섬에 이 낯선 남자와는 갈 수 있었다. 그 남자와는 섬보다 남자가 중요했지만 이 남자와는 남자보다 섬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누경,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이 남자도 누경에게 끌린 남자였다. 세상의 모든 남자를 가질 수 있어도 단 한 남자, 그토록 원하는 남자는 그녀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 점이 누경을 매마르게 만들고 있었다. 사막의 한가운데 던져놓고 기다리게 만드는 남자. 그래도 그에 대한 기다림은 멈출 수 없는 누경.  그런 누경을 두고 어떤 남자는 알 수 없는 감옥에 갇힌 포로라고 말했고, 실의에 빠진 채 취미도 없이 홀로 늙어갈 가여운 여자라고도 말했으며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다 살아버린 노파같이 이미 텅텅 비었다고도 하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구제 불능의 잠을 잘 여자라고 하거나 홀로 죽어서 고양이에게 먹힐 여자라고까지 악담을 늘어놓는 남자도 있었다.  두 남자, 기현과 강주... 그들 모두 누경을 자신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녀의 심장에 새겨진 "얼룩"을 보지 못하는 남자들. 누경은 그런 남자들에게 관심없어 보였다. 그런데 한 남자가 계속 비집고 들어오려고 한다. 섬에 함께 다녀온 남자였다.  사랑과 결혼...

[풀밭위의 식사]가 눈길을 끌었던 2가지 이유가 있다. 시원한 초록빛 풀밭의 책 배경 때문이 첫번째 이유인데, 요즘들어 가슴이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아 힘들었었다. 그러다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보게 된 전경린의 책, [풀밭위의 식사]를 보고서는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다. 두번째 이유는 평소 그림에 관심이 많은데 예전에 알게된 그림 중에 풀밭위에서 한 여자가 알몸인 상태로 정면을 응시하는 그림이 있었다. 마네의 그림으로 수치스러울 수도 있지만 오히려 당당하기만 했던 풀밭 위 여성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었다. 풀밭하니 마네의 그림이 떠올랐고, 이 두가지 이유로 서점에서 구입하게 된 전경린의 [풀밭 위의 식사]. 전체적 내용은 사랑으로 인한 상처와 아픔으로 힘들어하던 누경이 풀밭을 거닐다 한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정신적,육체적으로 피폐해져버린 누경이 점차 고통스러운 기억을 치유한다는 내용이다. 누경은 한번쯤은 뒤돌아볼만한 아름다운 얼굴의 소유자도 아니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활발함, 밝은 미소가 있는 여자도 아니다. 보기에도 힘없어 보이고 아무 의욕이 없어보이는, 사람을 멀리하는 상처받은 새일 뿐이다. 누경이 처음으로 사랑한 상대는, 자신의 먼 친척인 서강주. 어릴때 잠시 누경의 집에 살게되었던 친척 오빠인 서강주는 그녀에게 동경의 대상이었고 사랑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누경이 16살때 서강주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게되고, 이별의 아픔에 힘들어하던 누경은 풀밭을 찾게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낯선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게된다. 많은 시간이 흘러.. 대학교수가 된 서강주를 우연히 만나게 된 누경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되고, 둘의 위험한 사랑은 지속되다 깨져버린다. 서강주에게는 아내가 있고 , 그 아...

  조각은 날카롭기보다 푸르렀다. 박히기는 좋으나 찌르기엔 부족한 조각은 턱으로 밝기를 받치고 있었다. 여태까지 본 모든 것을 기억하겠다는 것을 살아온 것보다 본 것이 더 단단하리란 것을 믿기 때문일 것이나 유리 조각은 내가 본 모든 것을 가지고 갔다. <이병률, 찬란> <풀밭 위의 식사>를 읽는 내내 여자주인공의 모습을 되뇌었다. 딱딱한 말투, 흐릿한 눈빛, 생기 없이 비춰지는 마음 속 투명함을 지닌 누경은 유리를 닮았다. 속이 보일 정도의 투명함과 견고함을 지닌 유리는 쉽게 녹고, 깨진다. 유리의 성질만큼 차갑게 굳어버린 사랑의 그림자를 안고 사는 누경, 그녀는 감정에 유리(遊離) 되어 있다. 누구나 사랑을 꿈꾼다. 그리고 사랑을 한다. 한눈에 반하는 불꽃같은 사랑이거나 은은한 봄빛 같은 사랑,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는 첫사랑 등, 사랑의 종류는 복잡한 감정만큼이나 다양하다. 이렇듯 모든 형태의 사랑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삶의 흔적이다. 너와 나의 짧거나 긴 관계맺음이거나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삶의 진리를 알 수 있는 작지만 큰 경험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 책속 누경은 사랑을 했었다. 다소 냉정하게 말하자면, 불륜이란 말부터 떠오르는 위험한 사랑을 그녀는 했었다. 높은 하이힐의 유혹만큼 그녀의 감정은 매혹적이었지만 결국 유리병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누경이 사랑하는 사람을 함께 좋아해줄 수 없었다. 가정이 있고, 부모와 얽혀있는 혈연관계, 자기감정에 책임 질 수 없을 만큼의 배경을 가진 중년남성의 모습은 책을 읽는 내내 그녀에게 상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그들의 이야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