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는 것은 언제나 젊은 사람들의 몫”

  • 등록일 201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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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한 잎에도 생명과 사랑을 불어넣는 ‘풀꽃 시인’ 나태주 시인이 서른여섯 번째 시집 <한들한들>을 펴냈다. 나태주 시인은 주변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물과 소소한 일상에서 맑은 시어를 건져 올리고 그 안에 담긴 존재의 의미와 관계를 촌철살인으로 묘파해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는 시인이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나태주 시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면서도 세상과 시를 바라보는 시선과 통찰이 더욱 깊어졌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한 각 장의 표제지를 시인이 직접 그린 연필 그림으로 꾸며 시의 맛을 한층 돋운다.

45년을 시인으로 살아오면서도 자신을 “예비 시인”이라고 칭하고, 단 세 줄의 문장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시를 쓰면서도 “나의 시는 좀 더 가벼워져야 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야 했다”며 자기 검열을 멈추지 않는 시인, ‘그리고’라는 시를 시집의 맨 마지막 작품으로 고를 정도로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시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는 그는 우리 시대의 영원한 시인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마음 밭은 더욱 황폐하고 살아가는 일이 고달프다고 하는 오늘날. 좋은 시 한 편이 영혼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것은 진리다. 하지만 시가 어렵다고들 한다. 그래서 힘든 삶이 더욱 힘들게 느껴져 시를 멀리하게 된다고들 말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건넨다. 그의 시는 어렵지 않다. 쉽고 간결하다. 읽다 보면 마음이 순해지고 훈훈함으로 가슴이 차오른다.





Q 서른여섯 번째 시집 <한들한들>의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소회를 들려주세요.

우선 시집을 너무 많이 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를 쓰고 시집을 내는 일은 나로선 하나의 삶의 행위이고 그 과정이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런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조금쯤 인생을 여유 있게 뒤로 밀쳐놓고 바라보고 싶은 생각으로 이번 시집을 준비했습니다. 

Q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이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글쎄요. 시를 쓸 때는 무언가 묵직한 부담 같은 것을 느끼게 마련인데 이번 시집에서는 비교적 가벼운 시각과 마음으로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야구 선수가 어깨의 힘을 빼고 공을 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려면 쳐라, 내 그냥 맞아줄 테다” 그런 심정으로 썼습니다. 말하자면 매우 자유스러운 심정으로 썼다고 볼 것입니다. 

Q 시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셔서 ‘다작 시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많은 시를 쓰실 수 있는 비결은 어디에 있는지요?

‘다작시인’이란 말, 그런 말을 자주 듣지요. 다작이라서 꼭 나쁜 것이 아니고 과작이라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인생의 사이클과 문학(시)의 사이클이 맞아야 합니다. 그럴 때 좋은 시, 감동적인 작품이 나오게 되지요. 

시인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감성이 메마르고 시의 생산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욕구가 그만큼 강렬했다는 의미가 되고 호기심이랄지 미달감이랄지, 내부에 그리움이 많아서 그렇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상 시를 쓰게 하는 힘은 사랑, 열정, 그리움 그런 것들이 좌우합니다. 또 어린 아이 같은 천진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말랑말랑한 마음, 겸손한 마음, 모든 것들(사물, 인간, 감정)을 아끼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야 합니다.

다행히 나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그리운 것이 많고, 하고 싶은 일이 많고, 보고 싶은 사람이 많고, 아직도 풀지 못한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시 쓰기를 도와줍니다. 말하자면 여러 각도로 자료(감정, 경험, 인간관계)를 제공하고 나를 부추겨 준다는 얘깁니다.

요약하자면 아직도 철없는 마음이 계속해서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Q “언제든 책을 낼 때는 행운이란 생각을 한다”고 머리말에 쓰셨던데요.

그렇지요. 언제든 책을 낸다는 것은 행운이지요. 첫 책도 그렇지만 다음 책도 그렇고 언제까지나 책을 내는 일은 행운입니다. 책을 내는 일은 자신을 드러내어 세상에 보여주는 일입니다. 약간의 용기도 필요하고 자기 현시욕도 있어야 하고, 피관음적(被觀淫的) 요소, 말하자면 훔쳐봄을 당하고 싶은 마음, 들키고 싶은 야릇한 마음도 작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장애를 뚫고 책을 냈으니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하나의 감격이지요. 나의 생명의 비늘 하나를 세상에 떨어뜨리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생각해보면 그건 놀라운 축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료제공 : 밥북


Q “책에 실린 시들 가운데 몇 편만이라도 독자들에게 가서 잘 살기를 바란다”고 하셨어요. 이 책에 실린 시들 중 특별히 독자들에게 사랑받았으면 하는 시가 있다면요?

아, 그걸 내가 알 수 있나요? 지금껏 지나오면서 보니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선택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작가보다는 독자가 현명하고 옳습니다. 또 힘이 세기도 합니다.

독자의 선택을 받기로는 세월이 조금 필요합니다. 일단 작품이 독자한테 가서 싹트고 자라고 꽃을 피울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나의 어떤 작품이 독자한테 가서 선택되었나를 알게 됩니다.

시인과 독자가 겨룰 때 언제든지 독자가 이기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대표작은 어디까지나 독자가 결정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매우 당연한 귀결이지요.

생각 같아서는 1부에 나온 시들이 독자들한테 선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습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유심한 세계를 시로 쓰고 싶었던 것이 1부의 작품이니까요. 

Q 짧은 시 안에 촌철살인적인 직관이 들어 있는 나태주 시인의 평소 스타일과 달리 표제작인 ‘한들한들’은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띄더라고요.

일반 독자들한테 ‘풀꽃’이라든지 ‘행복’과 같은 짧은 형식의 시가 알려져서 그렇지 본래 나는 긴 형식의 작품도 많이 쓴 사람입니다. <변방>과 같은 시집은 한 제목으로 시집 한 권을 쓰기도 했으니까요. 

시의 길이는 시를 쓸 거리, 즉 시의 질료, 재료가 결정한다고 봅니다. 시가 결코 이야기는 아니지만 조금 긴 내용을 담으려면 산문 투의 형식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들한들’은 제자의 이야기를 나의 삶과 비교해서 쓴 작품인데 짧은 형식으로는 도저히 소화 불가능할 것 같아서 긴 형식의 산문 투를 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의 작품이 나에게는 결코 새로운 시도도 낯선 것도 아닙니다. 

Q ‘한들한들’에서 “왜 나는 그 애처럼 한들한들 살지 못했을까? 몇 줄짜리 시를 쓰고서도 꼬박꼬박 이름 석 자, 끼워 넣어 세상에 날려 보내며 50년을 고역으로 버텼을까!”라며 지금까지 시인으로서 살아온 삶을 돌아보셨는데요.

인생을 너무 빡세게 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살아도 결과적으로는 소모적인 것이 인생인데 인생을 열심히 부지런하게만 살아왔다는 후회와 개탄이 있습니다. 왜 나는 인생을 좀 더 여유롭게 좀 더 무심하게 살지 못했을까 하는 거죠. 

결국은 나의 출신이 한미한 집안이고 개인적으로 재주가 많지 않고 타인과의 경쟁에서도 늘 뒤지는 편이고 그래서 그저 모든 일들을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로 알고 살아서 그렇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기도 했다는 회한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이렇게 살아도 후회스럽고 저렇게 살아도 후회스럽다는 한 노인의 자탄이 들어있는 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Q 이번 시집을 내면서 시를 읽지 않는 젊은이들의 감성에 닿도록 노력을 하셨다고요. 

시라는 것은 늘 젊은 사람의 시각을 빌려서 써야 합니다. 감성도 젊은 감성을 지향해야 하고 언어나 시의 형식도 젊은이의 것을 차용하거나 닮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언제든 시라는 문학 형식은 늙은 사람의 몫이 아니고 젊은 사람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소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의 표현법도 단순하고 직설적이고 본질적인 쪽으로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하기는 이러한 경향은 이전의 모든 작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시는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맙니다. 왜냐고요? 시를 읽는 사람이 나이든 사람이 아니고 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몸으로는 늙은 사람이지만 마음은 보다 젊고 어린 사람입니다. 시로서 어려지는 것이지요. 이 또한 시를 쓰면서 갖는 하나의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Q “나의 시는 좀 더 가벼워져야 하고 군더더기가 없었어야 했다”고 하셨어요. 나태주 시인의 시만큼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시도 찾아보기 힘든데요. 시를 쓸 때 아직도 이런 주문을 외우시는지요? 그렇다면 시가 얼마나 더 가벼워져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아직도 나의 시에 군더더기가 있습니다. 시집을 내고 나서 1,2년 지나 다시 시집을 읽어보면 아차 싶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삭제했으면 딱 좋았을 문장이나 단어가 떡하니 시 작품 안에 버티고 있으면서 얼굴을 쏙 내밀기 때문이지요. 

조소(彫塑)와 조각(彫刻)의 방법 가운데 시는 조각의 방법입니다. 만연체라든가 부연체라는 것도 있지만 시에서는 그저 간결체가 최고입니다. 근간을 만들고 거기에 자꾸만 붙여나가는 것은 조소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시는 덩어리에서 자꾸만 필요 없는 부분을 떼어내는 조각의 방법입니다. 자코메티의 조각품 같은 시가 최고의 시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의 시는 아직도 비만하고 거추장스러운 장식(레토릭)이 많습니다. 시는 영혼에서 나오는 호소이기 때문에 황금덩이 같은 문장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버려야만 합니다. 시는 100명이 한 번씩 읽는 문장이 아니고 한 명이 100번씩 읽는 문장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시의 독자로서는 1명이 중요하고 중요한 겁니다. 그런 점에서 끝내 시는 경전의 문장을 지향하고 노래를 꿈꾸는 문장입니다.


자료제공 : 밥북


Q ‘가볍고 군더더기 없는 시’라는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초기 작품들에 비해 이렇게 단순한 형태의 시로 바뀐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45년 시인 생애를 두고 볼 때 20년쯤 지나오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시의 특수성(개성) 뿐만 아니라 보편성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처음에 나는 원력(原力)으로만 시를 쓰는 시인이었습니다. 나의 슬픔, 사랑, 소망을 기초로 하여 시를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나의 내부에서 솟는 샘물로만 시를 쓰던 시기였지요. 그러다가 중기를 지나오면서 나의 샘물뿐만 아니라 남이 보내주는 물도 모아 넓게 저수지를 이루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인데요. 나는 굳이 나의 마음만으로 시를 쓰지는 않습니다. 감정이입으로 타인의 심정을 빌려다가도 시를 씁니다. 그러다 보니 보편성이 보다 넓은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요즘 나의 시는 나의 시일 뿐더러 너의 시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공유하는 시인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의 시를 두고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고도 작고 바람을 잘 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다 멀리까지 날아가야 합니다. 그런 다음엔 나의 것이 아니라 너의 것이 되어 싹이 트고 자라고 또 그 가슴에서 꽃으로 피어나야 합니다. 

Q 2007년 정년퇴직 즈음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가 회복하신 것도 이후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2007년 교직 정년을 6개월 앞두고 쓸개가 복강으로 터져버려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습니다. 살아날 확률이 매우 낮았지요. 10만 명 가운데 한 명 정도 살아난다니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살아났지요. 좋은 병원, 의사, 간호사, 약품, 가족들의 헌신과 간호, 지인들의 염려와 기도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의 살고자 하는 노력, 자생력(自生力), 하나님의 가호가 뒤에서 도왔다고 봅니다. 도저히 가망 없는 병세 속에서도 나는 시를 생각했고, 시를 썼고, 또 연필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자생력을 높였다고 봅니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나도 살고 싶다는 강력한 의욕을 느끼곤 했습니다. 마음속에서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이 기쁨이 나를 살렸다고 봅니다. 그런 뒤에 정년퇴직을 했는데 사는 일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고 좋았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늘 취한 사람처럼 살았으니까요. 그런 과정 속에서 나도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시를 쓰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감동을 주는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최근 나의 시작업의 방향이고 또 분위기입니다.



Q 시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시가 바로 ‘풀꽃’이죠. 언제부터인가 ‘풀꽃 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스타’ 시인으로 만들어준 시이기도 한데요. 

이 작품은 내가 초등학교 교장으로 일할 때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 소감을 쓴 것인데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준 선물 같은 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이없게도 요즘은 나를 두고 ‘풀꽃 시인’이라고 하고 많은 곳에서 문학 강연을 청해 옵니다. 하나의 축복이요 행운이지요. 한 편의 작품이 이렇게 큰 파장을 일으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Q 2002년에 쓴 ‘풀꽃’이 2009년 두 번째 시화집 <너도 그렇다>에 그림과 함께 다시 실렸어요. 이미 2001년 첫 시화집 때부터 시인이 직접 흑백의 명암만으로 표현한 연필 그림을 시와 함께 싣고 있고, 이번 시집에도 몇 점이 소개돼 있는데요, 그림 그리는 일은 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흑백만으로 그리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본래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시를 쓰면서도 그림이나 화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림을 그린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2005년 논산의 한 초등학교 교감으로 있으면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운동장 축구 골대 앞에서 다 모스라진 민들레 한 그루를 만났지요. 그때 그 민들레한테 강한 충격을 받고 아, 이것을 좀 그려보아야 하겠구나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결국은 연필 그림 그리기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림 그리기는 하나의 명상 과정과 같습니다. 자아인 내가 죽고 타아인 풀꽃이 사는 시간을 갖지요. 풀꽃 그림 그리는 시간은 참 묘한 감동과 함께 기쁨을 주고 정신의 통일과 집중을 줍니다. 그러므로 연필로 풀꽃 그림 그리기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능력을 주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줄 아는 직관력을 또한 선사합니다. 그림을 흑백으로만 그리는 이유는, 컬러도 좋지만 흑백은 무한한 상상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완전한 색이 흑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Q 읽으면 마음이 순해지는 ‘동시 같은 시’가 나태주 시의 또 하나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40년 넘게 재직하신 이력과 관련이 있을까요?

네,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축복이라고 봅니다. 평생을 낮은 자리에 있었기에 받는 하나의 상장과 같은 것이지요.

내 생각으로는 시는 성인시와 동시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아이들이 읽어도 좋은 시를 함께 넣어서 시집을 만들곤 했습니다. 시면 시였지 동시와 성인시로 나눌 일이 아닙니다. 또 시를 서정시, 참여시 이렇게 갈래 치는데 이 점도 나는 불만입니다. 시는 그냥 시이지 서정시, 참여시가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시는 서정시일 뿐입니다. 

Q 현재는 공주문화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강연을 많이 다니신다고요.

강연 대상은 매우 다양합니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주부, 성인, 공무원, 노인에 이르기 아주 층위가 넓습니다. 그렇지만 강연 주제나 내용은 엇비슷합니다. 행복한 삶, 아름다운 삶이 주된 테마이고 거기에 시 이야기, 사랑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어떻게 하면 유익한 인생을 살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언제든 이야기는 매우 간결하고 쉽고 편안하게 풀어가려고 노력합니다. 

이제 우리는 의식주가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평안이 문제인 사람들입니다. 관광을 다니더라도 요즘 사람들은 먹을거리, 볼거리, 놀거리, 즐길거리를 넘어서 휴식과 평안과 위로가 있는 시간과 장소를 요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힐링입니다.


Q 책 말미에 실린 두 편의 산문에서 “나의 시는 언제나 보리밥으로서의 시였다”고 말씀하셨어요. 무슨 뜻인가요?

보리밥이 쌀밥에 비해 메이저가 아니라 마이너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나의 시와 인생이 메이저가 아니고 마이너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마이너로서의 인생과 시가 결코 싫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 나름대로 이제는 가능성도 있고 세상에 어필하는 바도 있고 도움도 준다는 것이지요.

나는 나 자신의 시와 인생이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위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같이 못나고 마이너인 사람도 이렇게 기쁘게 즐겁게 유익하게 인생을 사는데 당신 같이 나보다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 왜 그렇게 의기소침해서 사느냐?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소망과 기쁨을 갖고 잘 살아보자 그런 메시지가 되고 싶습니다. 

Q ‘살아있는 시인은 모두 예비시인’이라고도 하셨어요. 시집을 서른여섯 권이나 내신 대시인이신데, 아직도 자신을 부족한 ‘미완’의 시인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건 누구도 그렇습니다. 시인은 죽은 사람이 아니면 시인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시를 써야 합니다. 그래야 시 앞에서 겸손해지고 세상 앞에서 부드러워지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결국은 그래야 끝까지 조금이라도 좋은 시를 남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저 잘난 척 거들먹대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시는 시인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Q 살면서 네 가지 잘한 일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자가용을 소유하지 않은 일’이라고 하셨는데 “나를 태워 주오~”라고 노래하는 ‘나태주’라는 시에 그런 삶의 철학이 재밌게 녹아있더라고요. 대중교통이 발달한 도시보다 오히려 시골에서 더 자가용이 필요한데요. 자가용을 소유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자가용이 없는 것은 우선 돈이 없고 운전을 할 줄 몰라서 그렇지요. 그러나 그보다는 자가용을 타게 되면 걷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지요.

시 쓰는 사람은 언제나 생각이 많습니다. 그 생각들이 자가용을 운전하다보면 깡그리 날아갈 것 같아요. 그리고 시 쓰는 사람의 생각은 매우 속도가 빠르고 날카롭고 가변적입니다. 운전 행위와 이것이 매우 상치될 것 같아요. 그래서 스스로 진화하기를 포기한 것이지요.

그 대신 자전거를 탑니다. 걷는 것과 자동차 타기의 중간 형태인데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언제든 좋은 생각이 나면 터억 자전거를 받쳐놓고 볼펜을 꺼내어 생각난 것들을 쓰곤 하지요. 이런 삶이 좋아서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족들, 특히 아내가 많이 불편해 합니다. 그 사람한테 미안한 점이지요. 

Q ‘신달자’라는 시도 있어요. 신달자 시인의 반응이 궁금한데요? (웃음)

이백의 시 구절에 소이부답(笑而不答)이란 문장이 있는데 아마도 웃기만 할 뿐 달리 말씀이 없겠지, 싶습니다. 별 걸 다 시로 썼구나 하겠지요.

 


자료제공 : 밥북


Q ‘어제의 일’이란 시에는 특별히 ‘노트’를 적으셨어요. 그리 어려운 시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노트’라는 형식을 취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참 잘 보셨네요. 실은 노트 부분이 본래 쓴 시작품입니다. 그런데 좀 길게 써졌다 싶어서 다시 짧게 썼는데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고 그래서 본래 썼던 부분을 노트 형식으로 뒤에 딸렸던 겁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두 개가 다 실패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중간 형태를 찾았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참 시작품이란 것은 이렇게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면이지요. 

Q 맨 마지막에 실린 시가 역설적이게도 ‘그리고’라는 시입니다. 일흔 살이 넘었지만 시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계속된다는 시인의 다짐 같은 것으로 읽혔습니다.

우리 인생이 늘 ‘그리고, 그렇게, 그래서, 그러다가, 그렇지만, 그래도’ 이어지는 것이고 또 그러기를 소망하는 것이듯이, 나의 시와 나의 시인 인생이 앞으로도 그렇게 이어지고 나아가고 발전하고 변화되기를 소망하는 입장에서 이런 작품, 이런 단어를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어렵사리 숨겨놓은 의도와 비밀을 들켰다는 허망함도 있지만 잘 들켰다는 기쁨도 있게 마련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끝까지 놓치지 않고 읽어주시어.  

Q 나태주 시인의 ‘그리고’는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시인의 노력과 작업은 언제까지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언제까지 시를 쓸 것이며 시 앞에서 조바심하고 자발떨고 그럴 것이냐, 묻고 싶으신 것 같아요. 아마도 목숨이 남아 있는 날까지 그럴 것 같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시를 생각할 것이고 시를 세상에 남기려고 애쓸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대신 시를 쓰면서 살 것인가, 감옥에 들어가지 않는 대신 시를 쓰는 것을 포기하며 살 것인가, 그렇게 묻고 주문할 때 시인은 서슴없이 전자를 선택하는 사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시는 시인에게 삶 그 자체이고 밥이고 물이고 공기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독백했듯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더러 ‘쓰느냐 죽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by 글/사진이미회(북DB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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